AI 시대에 번영할 사람들
2026년 7월 6일 오전 11시(미 동부시간), 원문이 업데이트되었습니다.
핵심 요약
AI가 지능이라는 자원을 흔하게 만드는 시대, 사람을 가르는 기준이 바뀐다.
- 지능보다 인지 욕구: 앞으로 사람을 가르는 것은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라, 정신적 노력을 대하는 태도, 즉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 욕구”1다.
- 세 부류의 사람들: 인지 욕구가 낮은 “생산적인 승객들”, 중간인 “마지못한 최적화주의자들”, 높은 “정신적 마라토너들”은 AI 시대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통과하게 된다.
- 속이 텅 빌 위험: AI를 쓰는 동안에는 뇌 연결성이 떨어지고, AI를 자주 쓰는 사람일수록 비판적 사고력이 낮으며, AI를 쓰다 빼앗긴 의사들은 병변 발견 능력이 퇴화했다는 연구 결과가 잇따른다.
- 미래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인지 욕구는 어느 정도 타고나기도 하지만 맥락에 크게 좌우되므로, 학교와 조직이 제도를 바꾸면 사람들의 주체적 의지를 길러낼 수 있다.
- AI가 할 수 없는 것: AI에게는 갈망이 없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원하고, 어려움을 무릅쓰고 그것을 좇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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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아 인간에게 할 일이 없어질 거라던 예측을 기억하는가?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 같다. ActivTrak 연구진이 1만 명이 넘는 근로자의 디지털 활동을 분석해 보니, 사람들이 AI를 도입한 뒤 업무 강도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높아졌다. 이 초기 도입자들이 이메일, 메시지, 채팅 앱에 쓴 시간은 두 배 넘게 늘었다. 업무용 소프트웨어 사용량은 94퍼센트나 증가했다.
UC 버클리 하스 경영대학원 연구진에 따르면, AI를 쓰면서 코딩이나 엔지니어링 같은 작업이 쉬워지자 사람들은 예전에는 외주를 주던 업무를 직접 떠맡기 시작했다. 저녁에도, 주말에도, 대기실에서도, 그 밖에 잠깐이라도 짬이 나고 AI가 손 닿는 곳에 있으면 언제든 틈틈이 일을 욱여넣었다. 멀티태스킹도 훨씬 많아져, 저마다 다른 일을 하는 봇 여러 개를 동시에 감독하곤 했다.
이 연구들이 공통으로 가리키는 흐름은, 많은 사람이 AI로 아낀 시간을 일을 줄이는 데 쓰지 않고 새 업무를 떠맡는 데 쓴다는 것이다. 근로자 자신과 상사가 하루에 해내야 한다고 여기는 일의 양도 AI 때문에 달라지는 것 같다. 한 시간 한 시간이 더 빽빽하게 느껴지는 한편, 사람들은 더 지치고 정신이 없어진다. ActivTrak 조사에서는 방해받지 않고 집중해서 일하는 시간이 9퍼센트 줄었다. 이런 정신 상태를 가리키는 이름까지 생겼다. 바로 “AI 브레인 프라이(AI brain fry)“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흔한 일이다. 새로운 노동 절약 기술이 등장할 때마다, 기술은 잘 알지만 심리는 잘 모르는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그 기술로 삶을 더 편하게 만들 거라고 예측하곤 한다. 머지않아 우리 모두 주 15시간 근무를 누리게 될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많은 사람이 그 기술을 이용해 삶을 더 분주하게, 더 꽉 차게 만든다. 비행기, 기차, 자동차는 이동을 더 빠르게 만들어 시간과 노력을 절약해주는 기술이다. 그런데 그 덕에 사람들은 여행도 훨씬 더 자주 떠난다.
새로 열리는 AI 시대의 길잡이가 될 원칙을 하나 꼽자면 이렇다. 지능이 흔해지면, 주체적 의지가 귀해진다. 앞으로 두각을 나타낼 사람은 편안함을 좇아 수동적으로 AI에 기대 덜 일하려는 이들이 아니라, 성장을 추구하며 능동적으로 AI와 씨름해 자기 정신 능력을 키우고 더 많은 것을 이뤄내려는 이들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을 가르는 것은 얼마나 똑똑한가가 아니라 정신적 노력을 대하는 태도다. 지금 어떤 사람들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인지 욕구가 높다. 이런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는 일을 즐기고, 어려운 게임이나 밀도 높은 책도 좋아한다. 그 반대쪽 끝에는 인지적 구두쇠들이 있다. 이들은 골똘히 생각하는 일을 불쾌하게 여겨, 피할 틈만 보이면 어김없이 피한다. 그 사이에 있는 사람들은 인지 욕구가 중간 정도다. 정말로 관심 있는 일에는 노력을 기울이지만, 노력 자체를 즐기지는 않는다. 인지 욕구는 지능과 상관관계가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정말 똑똑한데도 열심히 노력하는 건 싫어하는 사람, 우리 주변에도 많다.
지금 상황으로 보면, AI를 어떻게 겪게 될지는 사람마다 크게 다를 것이다.
생산적인 승객들
인지 욕구가 낮은 사람들은 대체로 AI를 이용해 생각을 덜 하려 들 것이다. AI가 과제를 너무나 쉽게 만들어 주니 이들은 더 생산적으로 일하게 된다. 이들이 얻는 큰 이득이다. 그런데 AI가 과제를 너무나 쉽게 만들어 주니 이들의 정신적 역량은 줄어든다. 이들이 입게 될 큰 손실이다.
신은 청교도적인 존재였던 모양이다. 신은 우리를 고통 없이는 이득을 얻지 못하고, 노력 없이는 보상을 얻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이는 보디빌딩의 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식노동의 세계에서도 그대로 통한다. 인간은 최적 난이도 영역에 있을 때, 즉 감당하기 힘들 만큼 어렵지도 않고 아무 노력도 필요 없을 만큼 쉽지도 않은 과제에 몰두할 때 가장 잘 배운다.
AI는 노력을 적게 들이는 사람들을 최적 난이도 영역 밖으로 밀어낼 것이다. MIT 미디어랩(MIT Media Lab)의 나탈리야 코스미나(Nataliya Kosmyna)가 이끈 연구팀에 따르면, 비슷한 과제를 할 때 사람들은 ChatGPT를 쓰면 쓰지 않을 때보다 뇌 연결성이 최대 55퍼센트까지 떨어진다. 파서빌리티 사이언시스(Possibility Sciences) 공동창업자 비비언 밍(Vivienne Ming)은 사람들이 AI를 쓰는 동안 인지적 노력의 지표인 감마파 활동이 약 40퍼센트 줄어든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니 AI의 도움으로 한 일이 기억에 얼마나 남을지는 뻔하다. 사고력이 어떻게 될지도 그만큼 뻔하다. 스위스 SBS 경영대학원 마이클 게를리히의 연구에서는 “AI 도구를 빈번하게 사용하는 것과 비판적 사고 능력 사이에 유의미한 부적 상관관계”가 나타났다. 처음에는 AI가 사람을 끌어들인다. 실제로 AI를 사용하면 생산성이 높아지긴 한다. 하지만 그다음에는 능력도 지식도 줄어들면서, AI가 당신의 속을 텅 비워 버릴 위험이 생긴다. 가장 안타까운 사람들은 한동안 AI라는 목발에 의존하다가 그 목발을 빼앗긴 이들이다. 카네기멜론 대학교의 그레이스 리우가 이끄는 연구진은 피험자들에게 이런 과정을 겪게 한 뒤 이렇게 결론지었다. “AI의 도움을 받아 10분가량 문제를 풀었을 뿐인데도, 그 뒤 AI를 쓸 수 없게 된 사람들은 AI를 아예 사용한 적 없는 사람들보다 더 저조한 성과를 냈고 더 자주 포기했다.”
내시경(유연한 탐침으로 몸속을 들여다보는 시술)을 전문으로 하는 의사들을 조사한 연구가 있다. AI를 사용하기 전 이들은 대장내시경 검사의 28.4퍼센트에서 암 전 단계의 장 병변을 찾아냈다. AI를 쓰기 시작했다가 이를 빼앗기고 나자, 병변을 찾아낸 비율은 22.4퍼센트에 그쳤다. 이들의 병변 발견 능력이 심각하게 퇴화한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캘리포니아 애너하임 인근에서 끝없이 얽힌 고속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GPS 안내를 따라 출구로 빠졌다가 다시 진입로로 올라타기를 몇 번이고 되풀이하던 참이었다. 그때 우리 모두 한 번쯤 해봤을 법한 생각이 들었다. 예전엔 지도만 보고도 이걸 해냈는데! 이제 내게 그 일은 태평양을 걸어서 건너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다. GPS에 기대면 길 찾기 능력 몇 가지가 쪼그라들 뿐이지만, AI가 그러도록 내버려 두는 사람은 내면의 모든 것이 쪼그라들 위험이 있다.
마지못한 최적화주의자들
인지 욕구가 중간 정도인 사람들은 AI가 자신을 속 빈 존재로 만들 수 있음을 잘 안다. 그럴 가능성이 마음에 몹시 걸린다. 그래서 좋은 뜻을 품고 진지하게 다짐한다. 그런 희생자가 되지는 않겠다고. 하지만 정신없이 바쁘고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일상 속에서 결국 빨려 들어가고 만다. 다짐은 무너지고, 이들은 챗봇에 과도하게 의존하게 된다.
AI는 유혹적인 기술이다. MIT 미디어랩 연구진이 사람들에게 ChatGPT로 여러 편의 글을 연달아 쓰게 했더니, 한 편 한 편 쓸수록 AI에 기대는 정도가 점점 커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참가자들은 거의 복사해 붙여넣기만 하고 있었다. 이는 단순히 작업을 거듭하며 피로가 쌓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기술이 사람들을 한 마음가짐에서 다른 마음가짐으로 은근히 옮겨 놓은 것이다. 전통적인 교육 기관은 함양의 마음가짐 위에 세워져 있다. 열심히 노력하고 힘든 과제를 견뎌내면, 더 나은 사고력을 갖춘,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반면 현대 기술은 최적화의 마음가짐 위에 세워져 있다. 모든 것을 더 쉽게 만들어주는 기계를 찾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일을 해치우는 것이다.
기술 업계 전체가 최적화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다. 일례로 구글 검색 책임자였던 아밋 싱할은 2013년 가디언(The Guardia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사용자에게 광적으로 집중해, 사용자와 그들의 생각, 그리고 그들이 찾고자 하는 정보 사이에 생길 수 있는 마찰 지점을 모조리 줄이려 하고 있습니다.” - 아밋 싱할, 전 구글 검색 책임자
함양의 마음가짐으로 사는 사람은 마찰을 찾아 나서고, 최적화의 마음가짐으로 사는 사람은 삶이 마찰 없이 매끄럽기를 바란다. 현대 기술은 정신의 근육을 단련하던 당신을, 정신적으로는 소파에 늘어져 뒹구기만 하는 사람으로 바꿔 놓으려 한다.
최적화를 좇는다면, 당신이 노리는 것은 탁월함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산출물이다. 소프트웨어 기업 GoTo의 의뢰로 진행된 설문조사에서, 근로자의 43퍼센트는 AI가 생성한 콘텐츠에 오류가 있고 전반적으로 품질이 낮다고 의심하면서도 그대로 제출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머지않아 이 최적화주의자들도 인지 욕구가 낮은 사람들과 같은 식으로 속이 비어 갈 것이다. 호기심은 서서히 줄어든다. MIT의 발달심리학자 로라 슐츠의 연구에 따르면, 교사가 어떤 물건의 사용법을 가르쳐 주면 본의 아니게 그 물건에 대한 아이들의 호기심을 제한하게 된다. 반면 교사가 의도적으로 설명을 자제하면, 아이들의 호기심은 오히려 커진다. AI는 사용법부터 알려 주는 그 교사와 같다.
삶에 대한 전반적인 몰입도 서서히 줄어든다. 저장대학교의 우수칭과 상하이테크대학교의 류위쿤이 이끈 연구팀이 사람들에게 AI를 사용하게 한 뒤 이어서 AI 없이 다른 과제를 하게 했더니, 참가자들의 내재적 동기 수준은 평균 11퍼센트 떨어지고 지루함은 20퍼센트 늘었다. AI와 함께한 첫 과제가 더 즐겁게 느껴진 탓에, 그에 비해 평범한 작업은 시시해져 버린 것이다.
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 역시 점점 더 봇에 맞설 능력을 잃어갈 것이다. 이 기술 앞에서 당신은 매우 지적이지만 불완전한 존재와 능숙하게 대화를 주고받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자기 세계관을 세우거나 자기만의 지식 기반을 쌓는 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전문가들이 “인지적 항복”이라 부르는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봇이 하는 말은 뭐든 믿고, 봇이 가리키는 방향이면 어디로든 따라갈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의 연구자들은 AI가 가끔 틀린 답을 내놓도록 프로그래밍했다. 인간 참가자들은 열에 여덟 번꼴로 그 오류를 사실로 받아들였다.
최적화는 노력 자체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까지 바꿔 놓을 것이다. 이것이 최적화의 핵심 문제다. 크리스 시벤은 버지니아 북부의 작은 사립학교 리븐델의 교장이다. 어느 날 그는 학생들에게 200명이 넘는 예술가가 5년 넘게 매달려 만든 영화를 보여주었다. 학생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AI라면 5분 만에 만들었을 텐데요.”
시벤은 그 발언에서 뚜렷한 문화적 전환을 감지했고, 《미어 오소독시》2에 기고한 에세이에서 이를 “무심함의 산업화”라 불렀다. 그는 “어려운 텍스트와 씨름하고, 압박 속에서 논지를 수정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해본” 학생은 단순히 많은 정보를 아는 것을 넘어선다고 주장한다. 그런 학생은 더 단단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친구 키에르케고어3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사람은 오직 무언가에 열정적으로 헌신할 때에만 스스로를 하나의 자아로 세워 간다고.
그런 노력을 기울여 본 적도, 자아가 되어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시벤은 “AI라면 5분 만에 만들었을 텐데요”라는 말이 실은 속도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도덕적 가치의 재평가다.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지 고투가 아니고, 이미지이지 보는 행위가 아니며, 제품이지 그것을 만들 역량을 갖춰 가는 사람이 아니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AI는 “도제 수업 없는 능숙함을, 이해 없는 유창함을 제공한다”고 그는 결론짓는다. “이런 패턴을 내면화한 학생은 더 게을러지는 것이 아니다. 덜 빚어지고, 덜 깨어 있으며, 프롬프트에 손을 뻗지 않고는 어려움의 무게를 견딜 힘도 덜한 사람이 된다.”
정신적 마라토너들
이제 인지 욕구가 높은 사람들, 그리고 이들이 다가올 시대에 어떻게 지내게 될지 이야기할 차례다. 짐작하건대 이들은 마라토너와 비슷하게 지낼 것이다. 자동차는 26.2마일을 이동하기에 충분히 쓸 만한 기술이다. 그 거리를 달릴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할 실질적인 이유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 그들은 무언가를 성취하고 싶고, 자신의 역량을 확장하고 싶기 때문에 그 노력을 기꺼이 쏟는다.
인지 욕구가 높은 사람들은 생각하는 일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즐긴다면 당신도 아마 이들 중 한 명일 것이다. 한동안 붙들고 씨름해 온 프로젝트가 있다.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마감은 코앞이고 마음은 몹시 불안하다. 그런데도 당신은 끝내 답을 찾아낼 수 있다고 굳게 믿는다. 머리로는 과거에도 실패한 적이 있고 이번에도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동시에, 결국 해내리라는 것을 뼛속 깊이 안다. 이리저리 찾아보고 궁리를 거듭하다 보면, 어느 날 마법처럼 답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그 순간부터 학습 곡선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싫어하지만, 정신적 마라토너들은 바로 그 맛에 산다.
시카고 대학교의 존 카치오포(John Cacioppo)가 이끄는 학자 팀은 인지 욕구가 높은 사람들에 관한 100건이 넘는 연구를 검토했다. 그에 따르면 이런 사람들은 과제와 관련된 생각을 많이 하는 경향이 있다. 지적 자극이 되는 대화에 곧잘 참여한다. 인지적 종결 욕구와 통제 욕구도 높은 편이다. 일단 결론을 내리고 나면, 반증이 쌓여 가도 이들의 생각을 돌려놓기가 매우 어려울 수 있다.
AI 시대에는 정신적 마라토너들이 AI 엔트로피에 맞서 무척 애를 쓸 것이라고 나는 짐작한다. 이들은 독창적이고자 하는 강한 욕구를 느낄 것이다. 이 시대에는 글, 노래, 영화가 이미 생산된 것들의 종합이 되어가면서 문화적 산물이 점점 더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반면 마라토너들은 개인적이고, 자기만의 고유함을 반영하는 작업물을 만들고 싶어 할 것이다. AI로 자신의 주체성을 줄이기보다 늘릴 방법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기법도 이미 몇 가지 알려져 있다.
- 답이 아니라 힌트를 구하라: AI에게 질문에 직접 답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은 동기와 능력이 심각하게 저하된다. 하지만 AI에게 배경이 되는 사고 과정이나 보충 설명을 요청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 백지에서 시작하라: 챗봇을 찾아가기 전에, 먼저 빈 종이를 펼쳐놓고 자기 나름의 분석과 결론을 적어보라. 그런 다음 AI에게 생각을 대신 해 달라고 하지 말고, 그 생각을 따져 봐 달라고 요청하라.
- 작업을 번갈아 하라: AI와 함께 어떤 작업을 할 때마다, 그다음에는 AI가 개입하지 않는 작업을 이어서 하라. 그래야 창의적인 노력에 필요한 근육이 계속 살아 있다.
- 챗봇을 다시 설계하라: 일반 챗봇을 쓰면 학습에 방해가 된다. 하지만 작가 알베르토 로메로(Alberto Romero)가 지적하듯, AI 튜터를 쓰면 오히려 학습 효과와 동기가 높아진다. 챗봇은 대체로 질문에 답만 하는 반면, 튜터는 학생을 짜임새 있는 학습 여정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챗봇도 백과사전보다는 개인 트레이너에 가깝게, 즉 정신의 근육을 대체하지 않고 키워 주는 쪽으로 작동하도록 다시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 단순 반복 작업과 창의적 작업을 명확히 구분하라: 실무적인 이메일은 AI가 쓰게 하라. 하지만 에세이나 메모까지 AI에게 맡기지는 마라.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는 망신을 줘라.
- 사고 자체가 아니라 사상가를 구하라: 내가 클로드를 쓸 때 가장 좋아하는 요령은, 문제를 대신 생각해 달라는 부탁은 절대 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그 문제를 이미 다룬 적 있는 사상가들의 논의를 요약해 달라고 요청한다. 아동 발달을 이해하고 싶을 때는, 장 피아제(Jean Piaget)와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이 토론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고 한다. 내가 씨름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이 두 위대한 심리학자라면 서로 어떤 이야기를 나눌까? 그런 다음, 이들의 사유를 이해하려면 두 사람이 쓴 책 가운데 무엇을 읽어야 하는지 묻는다. AI를 신탁이 아니라 뛰어난 사서로 대할 때, 나는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는다.
여기서 내가 그리는 미래가 극단적인 인지적 양극화의 모습이라는 점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람들은 AI를 이용해 더 많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들, 어쩌면 대다수는 AI를 이용해 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이나 정치적 양극화가 나쁘다고 생각했다면, 인지적 양극화는 정말로 끔찍할 것이다. 사회는 둘로 갈라지고, 두 집단은 서로 다른 종처럼 보이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인지 욕구가 높은 사람들은 점점 더 생산적이고 점점 더 행복해지는 반면, 나머지는 일종의 정신적 하층 계급으로 전락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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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미래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나는 인지 욕구를 마치 타고난 어떤 특성처럼 다뤄왔다. 하지만 의지력은 유전적 기반이 어느 정도 있으면서도 맥락에 지극히 민감하게 반응한다. AI가 주체적 의지를 갉아먹는 경향이 있다면, 인간은 그것을 길러내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혁할 수 있다.
지금 우리의 교육 시스템은 콘텐츠와 지능을 중심으로 짜여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의 뇌에 콘텐츠를 다운로드한다. 그다음 고등학교를 이용해 똑똑한 아이들을 골라내 엘리트 대학으로 분리해 보낸다. AI 시대에는 학교가 그 지향점을 주체적 의지 쪽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온갖 분야에 대해 많이 아는 기계들에 둘러싸인 세상에서, 사람을 진정으로 구별 짓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고 지식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려는 욕구다. 따라서 정말 중요한 것은 지력이 아니라, 양질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정신적 마라톤을 기꺼이 달리려는 의지다.
우리 앞에 놓인 결정적인 과제는 인지적 복잡성을 스스로 찾아 나서려는 욕구를 사람들 안에 길러내는 일이다. 조지프 캠벨4식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본질적인 도전 과제는 이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삶을 영웅의 여정으로 바라보도록 어떻게 훈련시킬 것인가? 실패할 수도 있고 고통과 괴로움이 반드시 따를 어려운 임무를 스스로 떠맡는 여정 말이다. 몸과 마음이 포기하라고 아우성칠 때조차 계속 나아가 새로운 목적지에 이르고 답을 찾아낼 수 있도록, 사람들 안에 탐험가의 마음과 기꺼이 견디려는 의지와 끝까지 버티는 힘을 어떻게 길러 줄 것인가?
내가 보기에 AI 시대에는 모든 학교와 조직이 이런 질문들에 대해 저마다의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맡은 사람들에게 지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 이렇게 묻게 될 것이다. “네 마음 깊은 곳에서 진정으로 가장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세상에 진정으로 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무엇인가? 네 가장 고귀한 욕구를 우리가 어떻게 길러 줄 수 있을까?” 지금 우리 문화에서는 모두가 “네 열정을 찾아라”라고 말하지만, 그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으로는 학교와 조직이 그 방법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욕구는 우리가 직접 통제할 수 없으니 일이 복잡해진다. 거위 간의 맛을 억지로 좋아하게 만들 수 없듯, 의지만으로 더 호기심 많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다행히 욕구를 간접적으로 움직일 길은 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몸을 두느냐에 따라 욕구는 살아나기도 하고 사그라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중 상당수는 학생들의 정신적 노력에 대한 욕구를 꺾는 일을 꽤나 잘 해낸다. 아이가 교실에 앉아 지루해하는 1분 1분마다 그 욕구는 꺾여 나간다. 성적과 같은 외적 보상 역시 마찬가지인데, 외적 욕구가 내적 욕구를 밀어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성적 인플레이션 탓에 모든 것이 지나치게 쉬워지니 욕구도 짓눌린다. 합리주의자들은 사실을 배우고 논증을 검토하는 마음의 층위, 즉 선언적 층위에 초점을 맞춰 우리 시스템의 상당수를 설계했다. 이들은 동기가 싹트는 마음 깊은 곳, 그 어두운 숲에서 자신들이 어떤 피해를 입히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할 때가 많다.
다행히 학교와 조직은 욕구에 불을 지필 수도 있다. 동기 이론 가운데 가장 단순명료한 것은 에드워드 데시와 리처드 라이언이 창시한 자기결정이론이다. 사람들은 자율성(내 선택을 내가 통제한다), 유능감(내 역량이 성장하고 있다), 관계성(이곳 사람들이 나를 아낀다)을 누릴 수 있는 상황에서 동기를 느낀다. 내 경험상 사람은 무언가에 감탄할 때 동기가 커진다. 학생들이 위대한 인물이나 위대한 예술 작품을 마주하는 순간이 그렇다. 도제 관계도 마찬가지다. 멘토가 공학 기술뿐 아니라 공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법까지 가르쳐 줄 때, 배우는 사람의 동기는 커진다.
이 시대 전체를 두고 내가 가장 깊이 믿는 것이 있다. 인공지능이 무엇을 할 수 없는지 밝혀지면, 인간이란 무엇인지도 드러날 것이다. AI 이전에는 많은 사람이 이성과 지능이야말로 인간을 정의하는 특질이라 믿었다. 그것이 우리를 동물과 다르게 만든다고 여겼다. 하지만 머지않아 우리보다 훨씬 똑똑한 존재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이성과 지능이 인간을 정의하는 특질일 수는 없다.
AI가 할 수 없는 것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일이다. 물론 모델에서 강화학습으로 구축된 얇은 층위에는 보상과 비슷한 메커니즘이 몇 가지 있다. 하지만 모델이 하는 일은 거의 전적으로 예측이지 욕망이 아니다. 우선 AI에게는 생물학적 필요가 없으니 갈망할 수가 없다. 살아 있는 것들은 이런 필요에 떠밀려 자라고 탐험한다. 더 중요한 이유도 있다. AI에게는 자아가 없다. 봇에게는 한때의 자기 모습도, 앞으로 되고 싶은 자기 모습도 없다. 사람과 달리 봇에게는 마음 쓰는 것들의 구조도, 사랑의 질서도 없다. 봇에게는 개인적인 역사도, 이성적 계산보다 더 깊은 영역에서 경험한 저마다의 상처와 기쁨과 환희도 없으며, 마찬가지로 그 깊은 영역에서 잇달아 솟아나는 꿈과 희망도 없다.
합리주의자들이 예전에 우리에게 해 온 말과 달리, 삶의 대부분이 문제 풀이인 것은 아니다. 그런 일이라면 어떤 컴퓨터도 할 수 있다. 삶은 순례이고 여정이다. 어딘가를 향해 나아가고,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자기 자신을 확장하고, 아직 갖지 못한 어떤 가능성을 향해 손을 뻗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규정하는 특징은 추진력과 열망이다. 추진력은 정신적 노력을 감수하고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우리를 밀어붙이는 동력이고, 열망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 어떤 목적을 위해 사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를 아는 것이다.
사람들이 더 많이 원하고 더 많이 갈망하는 법을 익히도록 도울 수 있다면, 그들은 어려운 일을 해내기 위한 정신적 노력을 기꺼이 감수할 것이고, 우리는 눈앞에 닥친 인지적 양극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거기에 온 마음을 쏟도록 교육할 수 있다면, AI는 계산과 종합을 맡되 인간은 여전히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이 탐구할 가치가 있는지, 우리가 어떤 사명을 향해 나아갈지, 그리고 결국 어디에 다다를지를 정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봇으로 가득 찬 사회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은 지켜지고, 어쩌면 한층 더 강화될 것이다.
원문 최초 게시본에는 내재적 동기 수준과 지루함 정도를 측정한 연구진이 잘못 기재되어 있었으며, 이후 바로잡혔습니다.
역자 주
- 인지 욕구(Need for Cognition): 힘든 생각이나 복잡한 문제를 얼마나 즐기는지, 그 개인차를 가리키는 심리학적 구성개념이다. 1950년대에 처음 제시되었고, 심리학자 존 카치오포(John Cacioppo)와 리처드 페티(Richard Petty)가 1982년 측정 척도를 만들어 오늘날의 개념으로 정립했다. ↩
- 미어 오소독시(Mere Orthodoxy): 기독교적 관점에서 문화, 정치, 기술 등을 다루는 미국의 온라인 평론 매체다. ↩
- 키에르케고어(Søren Kierkegaard, 1813–1855): 덴마크의 철학자로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꼽힌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헌신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비로소 하나의 자아로 완성된다고 보았다. ↩
-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 미국의 신화학자로, 전 세계 신화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서사 구조를 “영웅의 여정(hero’s journey)“이라는 틀로 정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
저자 소개: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는 『The Atlantic』 의 전속 필자이며, 『How to Know a Person: The Art of Seeing Others Deeply and Being Deeply Seen』 의 저자다.
참고: 이 글은 David Brooks가 The Atlantic에 게시한 아티클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 The People Who Will Thrive in the AI Age - David Brooks, The Atlantic (2026년 6월 28일)
생성: Claude (Anthr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