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롬프트 엔지니어는 우리 시대의 예술가입니다
게시일: 2025년 11월 21일 | 원문 작성일: 2025년 11월 17일 | 저자: Danny Oppenheimer | 원문 보기
요약
- 카메라가 회화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추상화와 표현주의로 밀어붙였듯이, AI도 인간 창작성을 없애는 게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확장시켜요
-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사진이 예술 매체로 인정받았던 것처럼 정당한 예술 형식이 될 수 있어요
- 창작은 늘 도구와 협업하는 과정이었고, AI도 그냥 그 연장선이에요
- AI의 진짜 문제는 매체 자체가 아니라 노동 대체, 표절, 딥페이크 같은 거버넌스 문제예요
1839년, 회화의 죽음이 선언되다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 -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839년 최초의 다게레오타입 사진을 보고
프랑스 화가 폴 들라로슈는 미래를 본 거죠. 하지만 너무 일찍 미래를 엿본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그는 변화를 소멸로 착각한 거예요.
당연히 회화는 안 죽었어요. 대신 더 이상해졌죠. 몇십 년 만에 예술가들은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고, 원근법을 왜곡하고, 부드러운 치즈처럼 녹아내리는 시계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사실주의의 짐에서 벗어난 화가들은 추상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로 과감하게 뛰어들었고요. 사진이라는 도전이 회화를 가장 급진적인 혁신으로 밀어붙인 거예요.
오늘날 우리는 비슷한 얘기를 듣고 있어요. 이번엔 대형 언어 모델(LLM)이나 생성형 AI에 관한 거죠. 작가들이 대체될까요? 인간의 창작성은 이제 쓸모없어진 걸까요? 우리 모두 그냥 좋은 프롬프트 하나면 무용지물이 되는 걸까요? 특히 예술가, 시인, 시나리오 작가처럼 인간 고유의 독창성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려움이 퍼져 있어요.
하지만 사진의 역사가 우리한테 가르쳐주는 게 있다면 이거예요. 새로운 도구는 기존 형식을 없애지 않아요. 창작 영역을 재구성하고 확장할 뿐이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새로운 예술 매체
사실 어떤 예술계에서는 이단 같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는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요. AI한테서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려고 입력을 정교하게 만드는 행위, 즉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이 곧 정당한 예술 매체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거예요. 사진이 그 자체로 표현 형식이 됐듯이, LLM과 협업하는 과정도 창작의 수단이 될 수 있어요.
도구는 위협이 아니다
생성형 AI를 둘러싼 공포는 카메라 초창기 반응이랑 똑같아요. 19세기 중반, 많은 사람들이 사진이 화가의 기술 가치를 떨어뜨릴 거라고 두려워했죠. 미술 비평가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사진을 예술로 볼 가치가 없다고 일축했어요.
“진정한 예술은 언제나 가장 정교한 기계, 즉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지금까지 고안됐거나 앞으로 고안될 어떤 기계도 인간 손가락의 정교한 메커니즘과 결코 동등할 수 없다.” - 존 러스킨(John Ruskin)
하지만 매체는 성숙했어요.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같은 사진작가들은 회화의 감정적 울림에 견줄 만한 분위기 있는 표현주의적 이미지를 만들어냈거든요.
“사진에는 너무나 미묘한 현실이 담겨 있어서,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게 된다.” -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핵심 교훈은 뭘까요? 도구는 기계적일 수 있지만, 그 사용은 기계적이지 않아요.
오늘날 챗봇에 입력하는 예술적 프롬프트 자체가 표현의 한 형태가 되어가고 있어요. 서툰 질문과 영감 넘치는 질문 사이의 차이는 낙서와 반 고흐 작품 사이의 격차만큼이나 커요. LLM에게 “슬픔에 관한 시를 써줘”라고 요청하면 진부하고 감상적인 쓰레기를 얻게 돼요. 주목할 만한 결과를 내놓을 프롬프트를 만드는 데는 기술과 창의성이 필요하죠 (인내심과 반복적 조정은 말할 것도 없고요) — 물론 시에 관해서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수 있지만요.
예술은 협업이다
근데 예술가들은 늘 사용 가능한 도구에 의존해왔고, 종종 협력자들한테도 의지했어요. 화가들은 새로운 붓이나 색다른 도구, 자신이 발명하지 않은 재료를 실험하죠. 사진작가들은 렌즈랑 암실 작업을 조작해서 카메라 단독으로는 낼 수 없는 효과를 만들어요. 미켈란젤로조차 시스티나 성당 천장을 그리려고 비계를 설계해야 했죠. 자신의 비전을 실현하는 데 필수적인 기술적 해결책이었어요. 창작은 언제나 독창성, 협업, 도구 숙달의 혼합이었어요.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편집자의 기여로부터 큰 도움을 받고, 대부분의 작곡가들은 다른 음악가들한테 의지해서 자신의 창작적 비전을 실현해요. 창작은 혼자 하는 게 아니에요. 비전과 도구가 상호작용하는 과정이죠.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그냥 그런 상호작용의 한 형태일 뿐이에요. 뭘 어떻게 요청할지, 언제 이끌고 언제 따를지 아는 것.
“이것은 순수한 협업, 기계와의 상상력” - 레픽 아나돌(Refik Anadol), 예술가이자 AI 협업자
이런 관점에서 보면,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자동화보다 즉흥 재즈에 훨씬 더 가까워 보이기 시작해요. 반복적이고, 표현적이고, 장난기 넘치고, 놀라운 결과를 주는 거죠.
새로운 매체, 새로운 뮤즈
사진이 발명된 직후 수십 년을 다시 생각해볼까요. 예술가들이 카메라랑 경쟁하길 멈추고 카메라가 할 수 없는 것을 하기 시작했을 때요. 인상주의가 등장했고, 이어서 입체주의,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나타났죠. 화가들은 대체되지 않았어요. 해방된 거예요.
마찬가지로, 생성형 AI가 더 유능해지면서 인간 예술가들은 이미 적응하고 있어요. 기계가 할 수 없는 걸 하면서요. 모호함을 포용하고, 개념적 도약을 하고, 아이러니와 유머를 날카롭게 사용하는 거죠.
동시에 일부 예술가들은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어요. “데이터랜드(dataland)“라 불리는 세계 최초의 AI 미술관이 내년에 문을 열어요. 시인들은 하이브리드 작품을 출판하면서 요리사가 재료를 나열하듯 자신이 사용한 프롬프트를 공개하고요. 홀리 헤르던(Holly Herndon) 같은 음악가들은 자신의 목소리로 훈련된 AI 모델을 사용해서 혼자서는 절대 부를 수 없는 하모니를 만들어내죠.
이 글도 AI의 도움으로 쓰였다
심지어 이 글도 상당한 AI 지원을 받아 작성됐어요. AI는 인용문을 추적하고 검증하는 걸 도왔고, 예시를 제안했고, 내 글을 편집했고, 심지어 내 논증에 포함시켜 편집한 산문까지 제안했죠. 반복된 편집 과정을 거친 후엔, 이 글의 어느 부분이 AI가 쓴 것이고 어느 부분이 내가 쓴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워요.
사실 그렇게 하는 건 내 오타를 잡아내고 고쳐준 맞춤법 검사기한테 저자 권한을 줘야 하는지 논쟁하는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고 무의미해요. 나는 AI 지원 없이는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 내 미술사 지식이 충분히 깊지 않거든요 — 그리고 AI는 내가 결과물을 유도하려고 만든 프롬프트의 자극 없이는 이 글을 쓸 수 없었을 거고요. 결과물은 우리 중 누구도 혼자서는 만들어낼 수 없었던 거예요. AI는 그게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표현의 기회를 열어줬어요. 그것도 일종의 예술이죠.
미래를 (다시) 두려워하지 말자
물론 예술과 생성형 AI의 관계에는 진짜 걱정할 만한 부분들이 있어요. 노동 대체, 표절, 딥페이크, 알고리즘 편향 같은 거요. 이런 건 진지한 규제를 받아야 할 심각한 문제들이에요. 하지만 이건 거버넌스의 문제지, 매체 자체에 반대하는 본질적인 논거는 아니에요.
역사적 교훈: 새로운 기술과 예술의 관계
| 기술 | 시대 | 초기 두려움 | 실제 결과 |
|---|---|---|---|
| 사진 | 1839년~ | 회화가 사라질 것 | 추상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탄생 - 예술의 해방 |
| 영화 | 1890년대~ | 연극이 소멸할 것 | 새로운 무대 작품 창조, 브로드웨이 활성화 |
| 인쇄기 | 1450년대~ | 대량 배포에 대한 우려 | 프루스트와 선전물 모두 가능 - 도구는 중립적 |
| 생성형 AI | 2020년대~ | 인간 창작성이 무용지물이 될 것 | 새로운 형태의 예술과 협업 가능성 (진행 중) |
인쇄기가 프루스트랑 선전물을 모두 가능케 했고, 카메라가 스냅샷과 감시를 모두 낳았듯이, AI 역시 쓰레기와 위대함을 모두 만들어낼 거예요. 답은 사용을 중단하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사용하는 거죠.
사실, 우리는 이미 이런 상황을 겪어봤어요. 영화가 발명됐을 때 일부는 연극의 죽음을 예고했죠. 실제로 벌어진 일은 조금 달랐어요. 영화라는 매체 고유의 특성에 걸맞는, 연극에서는 아마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작품들이 탄생했거든요. 미녀와 야수나 라이온 킹 같은 거요. 그리고 그것들은 다시 인기 있는 무대 버전에 영감을 줘서 브로드웨이에 새로운 활기를 줬고요.
우리는 새로운 도구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래된 도구를 존중할 수 있어요. 그리고 인간 창작성은 우리가 혼자 만드는 것으로만 정의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도구를 어떻게 형성하고 도구에 의해 어떻게 형성되는가로 정의된다는 생각도 받아들일 수 있고요.
역사가 길잡이라면요, 오늘날의 프롬프트 엔지니어는 내일의 피카소가 될지도 몰라요. 다만 붓과 캔버스 대신, 그들의 매체는 언어와 논리, 제안과 전복, 잘 배치된 일련의 단어들과 놀라움을 포착하는 눈이 될 거예요.
저자 소개: Danny Oppenheimer는 카네기멜론 대학교 심리학과와 의사결정과학과 공동 임용 교수예요. Democracy Despite Itself의 저자이기도 하고요.
참고: 이 글은 Danny Oppenheimer가 MIT Press Reader에 게시한 아티클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 The Prompt Engineer Is the Artist of Our Age - Danny Oppenheimer, MIT Press Reader (2025년 11월 17일)
생성: Claude (Anthr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