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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레드시트처럼 보기

게시일: 2026년 5월 26일 | 원문 작성일: 2026년 3월 26일 | 저자: David Oks | 원문 보기

녹색 CRT 화면 앞에 앉은 인물과 책상 위 미니어처 도시를 그린 16비트 픽셀 아트

전자 스프레드시트는 단순한 계산 도구가 아니었다. 비지캘크(VisiCalc)의 등장부터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의 지배까지, 스프레드시트는 기업이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었다. 차입 매수(LBO)와 사모펀드의 폭발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수치화할 수 없는 것들을 지워버리며 기업을 “계약의 집합체”로 보는 시각을 상식으로 만들었다. 저자는 이 역사를 거울 삼아, AI 역시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파괴할 만큼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인류의 모든 야망과 성취와 어리석음에 대한 최종 결산이 이루어진 뒤, 마지막 역사가가 우리가 “컴퓨팅”이라 부르는 그 기묘한 인간 활동의 영역으로 눈을 돌리는 날을 상상해 보자. 인간 삶의 믿기 어려울 만큼 큰 부분을 점차 집어삼키며 세상 전체를 자신의 논리로 재편해 온, 그 낯선 기획 말이다. 그날 역사가는 무슨 말을 할까? 아마도 룰루스, 배비지, 러브레이스 같은 선구자들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이어서 진정한 개척자들인 튜링, 처치, 섀넌, 폰 노이만으로 넘어가고, 하드웨어의 거장 노이스와 킬비, 소프트웨어의 거장 리치와 다익스트라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페이지랭크, 추천 시스템, 신경망, 트랜스포머 아키텍처, 그리고 결국 스스로를 부트스트래핑하여 초지능으로 도약함으로써 역사의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된 어떤 시스템에까지 당도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장대한 궤적을 기록하는 연대기의 어딘가에서, 적어도 몇 페이지에 걸쳐, 그 역사가는 전자 스프레드시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전자 스프레드시트. 이토록 어디에나 존재하면서도 이토록 사랑받지 못하는 도구가 또 있을까? 오늘날 스프레드시트 범주를 정의하는 제품인 마이크로소프트 엑셀(Excel)이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응용 소프트웨어라고 말해도 과장이 아니다. 전 인류의 약 6분의 1이 사용자이며, 수조 달러에 달하는 자본 배분 결정이 이 도구를 거쳐 내려진다. 그럼에도 스프레드시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리눅스나 러스트, 혹은 유독 빠른 파이썬 패키지 매니저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사람들은 있다. 하지만 엑셀의 진정한 팬은 찾기 어렵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도구의 특징이기도 하다. 너무나 어디에나 있는 나머지, 묘하게도 익명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스프레드시트를 이해하지 않고는 지난 수십 년간 미국 경제의 변화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의 소프트웨어가 미국 기업들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남들에게 이해되는 방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금융 공학과 월스트리트 딜메이킹 기구 전반의 부상을 어떻게 떠받쳤는지, 미국 기업을 무언가를 만드는 조직에서 숫자를 최적화하는 조직으로 어떻게 재편했는지, 그리고 인공지능이 경제생활을 변화시킬 방식에 대해 어떤 교훈과 경고를 우리에게 전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우선 엑셀 이전의 세계에서 시작해야 한다.

관료제 대 인간 중심 조직 – ME&A
관료제 대 인간 중심 조직 (출처: ME&A)

스프레드시트 이전의 세계

기업은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 단일한 권위 아래 활동을 조율하기로 합의한 사람들의 집합이다. 어느 기업에나 경영진이 있다. 경영진은 가장 기본적인 수준에서 정보 처리자로 존재한다. 정보를 처리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자원 배분에 관한 결정을 내리고, 그 결정에 기반하여 아랫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린다. 그들은 기업의 두뇌다.

그리고 모든 기업은 결국 그 두뇌의 처리 능력에 발목을 잡힌다. 경영진이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새로운 직원이나 프로젝트, 부서가 추가될 때마다 경영진이 추적해야 하는 네트워크에 노드가 하나씩 더해지고, 그 네트워크의 복잡성은 노드 수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한다. 그래서 어떤 기업이든 규모와 복잡성에는 자연적인 한계가 있고, 그 한계는 결국 정보를 처리하고 행동을 조율하는 경영진의 역량이 정한다.

전근대 세계에서는 정보 처리와 행동 조율 모두 극히 비용이 많이 들었다. 통신은 느렸고, 비교적 작은 혈연 집단을 벗어난 조율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기업들은 가족, 혹은 수도원처럼 그에 못지않게 신뢰가 두터운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지역적 사업체에 머물렀다. 세계의 거의 모든 사업체는 가족 기업이었다.

이것이 바뀐 것은 증기기관의 등장과 함께였다. 증기기관이 가능하게 한 기계적 동력은 경제생활의 속도와 규모, 복잡성에 극적인 가속을 가져왔다. 이윤의 기회를 크게 확대했지만, 본질적인 위험성과 복잡성 탓에 그만한 수준의 통제도 함께 요구했다. 공장이 만들어내는 모든 복잡성을 처리할 수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1840년대부터 1920년대 사이에, 우리는 대규모로 정보를 전달하고 행동을 조율하기 위해 설계된 기술들의 등장을 목격하게 된다.

  • 전신
  • 고속 인쇄기
  • 서류 캐비닛
  • 타자기
  • 전화
  • 천공 카드 처리기
  • 칸막이 원장(columnar pad)

이것이 바로 “통제 혁명”이었다. 정보를 처리하고 활동을 조율하는 이 새로운 역량과 함께, 현대적 기업이 등장한다. 전근대 시대의 어떤 기업보다도 훨씬 크고, 야심차며, 중앙집권적인 조직이었다. 전문 경영인이 운영하는 관료적 실체였고, 노동과 자본을 대규모로 조율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이때 비로소 기업의 두뇌가 실체를 갖게 됐다. 제너럴 모터스 같은 회사에는 사업 운영 현황에 관한 수백 건의 보고서가 매주 본사로 쏟아져 들어왔다. 사무원들은 이 보고서들에서 수치를 뽑아 칸막이 원장에 옮겨 적었다. 열과 행으로 칸을 친, 녹색 빛이 도는 긴 종이였다. 그런 다음 집계된 숫자들을 감독관에게 전달하면, 감독관은 이를 다시 요약하여 경영자에게 넘겼다. 경영자는 이번 달 수치와 지난달 수치를 비교하고 편차를 파악하고 설명을 제시하고 발견 사항에 관한 타이핑된 메모를 작성한 뒤, 최종적으로 결정 사항을 계층 구조 아래로 전달하여 실행하게 했다. 당시로서는 정말로 경이로운 기구였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대단히 한계가 있는 기구이기도 했다. 명백한 결함은 정보 처리가 극히 노동 집약적이라는 것이었다. 자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가장 피상적인 수준으로나마 파악하는 데도 수많은 사무원이 필요했다. 이는 더 야심찬 분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경영진이 자사에 대해 던질 수 있는 질문의 수와 복잡성에는 엄격한 상한선이 있었다. 1920년이나 1950년의 기업 운영 방식을 들여다보면, 왜 어떤 일은 일어나고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는지 이해하려는 시도에 얼마나 많은 추측이 개입되어 있었는지 놀라게 될 것이다. 그들은 암흑 속에서 비행하고 있었다.

VC&G | » [ 이주의 레트로 스캔 ] 비지캘크 30주년
비지캘크(VisiCalc) 30주년 기념 레트로 스캔 (출처: VC&G)

스프레드시트의 탄생

이 균형을 무너뜨린 것은, 다른 많은 것들이 그랬듯, 무어의 법칙이었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치며 마이크로프로세서가 점점 더 저렴해지고 강력해지면서, 기업 세계의 회계 작업을 누군가가 컴퓨터로 옮겨내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결국, 댄 브리클린이라는 27세 엔지니어였다.

브리클린은 MIT에서 컴퓨터 과학을 공부했고, 그 후 몇 년간 미니컴퓨터를 개척한 회사인 디지털 이큅먼트 코퍼레이션에서 워드프로세서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 하지만 그는 비즈니스 쪽에 끌렸고, 1970년대 말 DEC를 떠나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978년 하버드 강의실에 앉아, 교수가 칠판에서 기업 가치 평가에 얽힌 복잡한 계산들을 풀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브리클린은 문득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을 그냥 컴퓨터로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말했듯이, 숫자를 다루는 워드프로세서를 그냥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전자 스프레드시트라는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브리클린은 이 아이디어가 황금알이며, 자신의 창업 도전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MIT 친구인 밥 프랭크스턴과 팀을 이뤄 소프트웨어 아츠(Software Arts)라는 회사를 창업했고, 1978년과 1979년의 대부분을 전자 스프레드시트의 비전을 현실로 만드는 데 쏟아부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브리클린과 프랭크스턴은 자신들의 제품을 애플 II용으로 설계하고 있었는데, 이 기계의 메모리는 현대 노트북보다 수십만 배나 적었다. 워드프로세서가 요구하는 자원은 그나마 감당할 만했다. 문서란 결국 메모리에 순차적으로 저장된 문자들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프레드시트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각 셀에는 값, 수식, 서식, 그리고 종속성 정보가 담겨 있었고, 이 모든 것을 저장하는 데 필요한 메모리는 금세 불어났다. 실용적인 크기의 격자만 해도 기계의 용량을 금방 소진시킬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브리클린과 프랭크스턴은 바이트 하나하나를 어떻게 쓸지까지 정밀하게 따져야 했다. 두 사람은 패키지 전체를 애플 II의 6502 마이크로프로세서용 어셈블리 코드로 작성했고, 오버헤드를 최소화하기 위해 셀을 32바이트 고정 청크에 저장했으며, 작은 값이 몇 바이트만 차지하도록 타입 표시자를 포함한 가변 길이 형식으로 값을 표현했다. 이 모든 독창성을 발휘하고도 결과물로 나온 스프레드시트는 현대 기준으로 보면 아담한 수준이었다. 비지캘크(VisiCalc)의 격자는 겨우 63열, 254행에 불과했다. 오늘날 스프레드시트 사용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 비하면 작은 화폭이었지만, 앉아서 사용하는 모든 사람의 작업 방식을 바꿔놓기에는 충분했다. 모든 설계 결정은, 결국, 메모리를 어떻게 아끼느냐의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의 세심함은 빛을 발했다. 두 사람이 만든 소프트웨어 패키지는 1979년 말 “VisiCalc”(보이는 계산기)라는 이름으로 애플 II용으로 출시되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소프트웨어 공학의 경이로움이었다. 칸막이 원장(columnar pad)의 조직적 은유와 워드프로세서의 상호작용성, 그리고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속도를 절묘하게 결합한 것이었다. 이제 계산을 즉각적으로 하고 또 고칠 수 있었다. 복잡한 수식을 손으로 직접 계산하는 대신 프로그래밍 방식으로 실행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몇 시간이 걸리던 일이 이제는 몇 분이면 됐다. 비지캘크는 그야말로 강력한 도구였다. 그리고 그것은 취미용 기기였던 애플 II를 쓸모 있는 업무용 기계로 탈바꿈시켰다. 비지캘크의 힘이 워낙 강력했기에, 저널리스트 존 마코프가 쓴 것처럼, 애플 II는 주로 “비지캘크 액세서리”로 팔렸다. 그것은 사람들이 실행하기 위해 일부러 하드웨어를 구매한 최초의 소프트웨어, 즉 최초의 킬러 앱이었다.

하지만 전자 스프레드시트를 세상에 내놓은 소프트웨어 아츠는 그 카테고리를 오래 장악하지 못했다. 브리클린과 프랭크스턴은 본질적으로 컴퓨터 과학자였고, 비지캘크 출시 후 몇 년간 엔지니어와 과학자를 대상으로 한 틈새 프로그램인 TK!Solver에 자원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1981년 IBM이 내놓은 개인용 컴퓨터에 비지캘크를 이식하는 작업이 늦어졌다. 출시 직후 기업 시장을 빠르게 장악한 바로 그 기계였는데도 말이다.

그 기회를 잡은 것은 미치 카포라는 인물이었다. 카포는 한때 초월 명상 전임 강사였다가, 비지캘크를 마케팅하고 유통하는 회사인 VisiCorp의 개발 책임자로 일했다. 전자 스프레드시트 시장의 기회를 간파한 그는 경쟁사를 차리기로 했다. 1983년 초, 그의 회사 로터스(Lotus)는 IBM 기계를 위해 특별히 설계된 로터스 1-2-3 전자 스프레드시트를 출시했다. 로터스 1-2-3은 비지캘크보다 크게 진화한 제품이었다. 기본 스프레드시트 기능 외에도 차트와 간단한 데이터베이스 기능을 제공했고, 256열에 8,000행 이상으로 훨씬 큰 격자를 처리할 수 있었다. 카포는 순식간에 브리클린과 프랭크스턴을 앞질렀다. 소프트웨어 아츠는 흔들리다가 1985년 로터스에 매각됐고, 로터스는 이후 몇 년간 스프레드시트 시장의 독보적인 선두 주자로 군림했다. 한창 전성기에는 자체 잡지까지 있었을 정도다.

하지만 로터스의 독주 시대도 오래가지 않았다. 비지캘크와 로터스 1-2-3은 모두 방향키로 탐색하는 키보드 기반의 텍스트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시애틀의 야심 찬 소프트웨어 회사 마이크로소프트가 간파한 미래는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GUI)에 있었다. GUI를 사용하면 타이핑한 명령어와 키 입력을 화면 위의 직접 조작으로 대체할 수 있어, 스프레드시트를 다루는 일이 마치 실제 문서를 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바로 마이크로소프트가 자사의 스프레드시트 제품인 마이크로소프트 엑셀(Excel)로 던진 승부수였다. 이제 마우스로 가리키고 클릭하고, 인쇄했을 때 나타날 모습 그대로 화면에서 글꼴과 서식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GUI가 미래라는 마이크로소프트의 판단은 옳았다. GUI 패러다임은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을 거치며 개인용 컴퓨터 시장을 점진적으로 정복했고,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 운영 체제가 부상하면서 패권을 굳혔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엑셀을 워드프로세서 Word, 프레젠테이션 도구 PowerPoint와 함께 마이크로소프트 오피스로 묶어 출시하자, 로터스의 운명은 사실상 결정됐다. 텍스트 기반 패러다임에 발목 잡힌 로터스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995년 IBM에 매각됐다. 그렇게 엑셀이 스프레드시트 전쟁에서 승리했다.

Renegades of Junk: The Rise and Fall of the Drexel Empire | Bloomberg Business - Business, Financial & Economic News, Stock Quotes
드렉셀 번햄 램버트 제국의 흥망성쇠를 다룬 블룸버그 비즈니스 기사. (출처: Bloomberg Business)

스프레드시트 혁명

하지만 전자 스프레드시트가 하나의 제품으로서 걸어온 역사보다 궁극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로 무엇을 했느냐는 이야기다.

비지캘크와 그 후계 제품들이 표면적으로 제공한 것은 분명했다. 계산과 회계 작업을 획기적으로 빠르게 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스프레드시트가 가져온 양적 개선이 워낙 극적이어서, 일의 성격 자체가 질적으로 달라질 정도였다. 이 새로운 도구의 혁명적 잠재력은 일찍부터 인식됐다. 1984년, 하퍼스 매거진은 “스프레드시트적 지식 방식”의 출현을 선언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스프레드시트를 둘러싼 일종의 숭배 집단이 형성되었다. 구루와 입문자들, 상세한 전승, 비밀스러운 의식. 그리고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은 숫자와 수식으로 이루어진 행과 열로 구현될 수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까지, 모두 갖추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복식 부기가 발전하면서 가져온 변화, 그에 견줄 만한 효과를 전자 스프레드시트의 등장이 낳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새로운 스프레드시트처럼, 차변과 대변을 구분하는 복식 원장은 상인들에게 자신의 사업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주었고, 이쪽을 줄이고 저쪽에 투자하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를 페이지 위에서 바로 보여주었다. 복식 부기가 스케치라면, 전자 스프레드시트는 유화다.

— 하퍼스 매거진, 1984년 11월

하지만 스프레드시트가 한 일은 단지 경영자들에게 “자신의 사업을 더 정확하게 보는 시야”를 준 것 이상이었다. 스프레드시트의 진정한 잠재력은 사람들이 무엇을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상상할 수 있게 해주었느냐에 있었다. 계산 비용이 너무나 저렴해진 덕분에, 이제 같은 작업을 거듭 반복할 수 있었다. 예측을 세운 뒤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가정들을 이리저리 조정해보는 식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의 목표값 찾기와 솔버 기능에 이르러서는 이 논리가 아예 대놓고 구현됐다. 두 기능 모두 이미 1990년대 초에 등장해 있었다. 미리 정해둔 결과값에서 거꾸로 입력값을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TK!Solver의 기본 아이디어를 더 성공적으로 구현한 셈이다.)

그렇게 계산 비용이 점점 영에 수렴하면서, 모델링은 시뮬레이션에 가까운 무언가로 변모했다. 스프레드시트의 행과 열을 통해 무한한 수의 잠재적 세계를 탐색할 수 있었다. 스프레드시트는 정적인 기록이 아니라, 계속 만지작거리며 탐색하는 제어판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보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 세계를 보는 새로운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것으로 드러났다.

브리클린과 프랭크스턴이 비지캘크를 만들던 그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지, 그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미국 자본주의는 무너지고 있었다. 오일 쇼크와 십 년에 걸친 재정·통화 과잉이 걷잡을 수 없는 인플레이션과 성장 침체1를 낳았다. 주식 시장은 실질 기준으로 그 십 년 동안 절반 이상 폭락했다. 성장이 멈추면서 노동과 자본, 국가 모두가 각자의 몫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던 전후 합의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 교착 상태에 대응하여, 정책 입안자들은 금융으로 눈을 돌렸다. 수십 년간 금융 활동을 제약해왔던 규제 장치가 해체됐다. 새로운 금융 상품들이 꽃피울 수 있게 됐다. 인플레이션을 최종적으로 잡기 위해 폴 볼커2의 연방준비제도는 현대 역사상 가장 높은 수준으로 금리를 끌어올렸다. 이 정책 결정들이 맞물린 결과, 금융 자산은 더없이 매력적인 투자처가 되었다. 인플레이션이 잡히면서, 이제는 높은 명목 수익률이 그대로 눈부신 실질 수익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후 1980년대를 거치며 금리가 하락하면서 기존 채권 보유자들은 막대한 자본 이득을 거뒀다. 모든 곳에서 자본이 몰려들었고, 미국 신용 시장은 팽창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들이 맞물리면서, 즉 하락하는 금리, 풍부하고 점점 과감해지는 신용, 억눌린 주가, 그리고 전후 제약에서 해방된 금융이 한데 모이면서, 새로운 유형의 경제 행위자가 등장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사모펀드였다.

금융 분야에서 자본을 조달하고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젊은이라면, 기업 인수를 통해 막대한 돈을 벌 수 있는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자신의 돈은 소액만 내고 유리한 금리로 막대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주가가 워낙 낮았기 때문에, 자산 가치 이하로 기업을 살 수도 있었다. 심지어 인수 대상 기업의 자산과 현금 흐름을 담보로 제공할 수도 있었다. 일단 기업을 소유하면 사업부를 분할 매각하고 자산을 처분하고 군살을 제거해 구조 조정할 수 있었다. 아니면 그냥 몇 년을 기다리며, 금리가 떨어지고 주가 배수가 올라가길 기다렸다가 팔 수도 있었다. 거래가 성공하면 자기가 댄 소액 지분에 대한 수익률은 엄청났다. 레버리지는 손실을 키우듯 이익도 키우기 때문이다. 실패하더라도 손실은 대부분 대출 기관이 떠안았다. 이것은 위험과 보상 사이의 기막힌 비대칭이었다.

이것이 바로 차입 매수(LBO)3였다. 이를 개척한 것은 콜버그 크래비스 로버츠(KKR)4라는 작은 회사였다. KKR은 1979년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 후다이유(Houdaille)5를 인수하면서 이 기법이 얼마나 수익성이 높은지를 증명해 보였다. 자기 자본 100만 달러만 내고 3억 5,500만 달러짜리 기업을 인수한 것이다. KKR의 성공에 고무된 수많은 모험적인 이들이 뛰어들어 전통 있는 기업들을 사들이며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다. 한때 조용하던 인수합병 분야가 온 나라가 들썩이는 무대로 떠올랐다.

하지만 LBO의 어려운 점은, 엄청난 양의 계산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레버리지를 활용한 거래에서는 관련 가정들을 조금만 바꿔도 자기자본 수익률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레버리지는 모든 것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모펀드들은 위험을 파악하기 위해 방대한 범위의 시나리오를 모델링해야 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자 스프레드시트보다 유용한 도구는 없었다.

스프레드시트 이전에는 기업 하나를 분석하는 데 몇 주가 걸렸다. 하지만 비지캘크가 출시되고 나서는 책상 위에서 LBO 모델을 구축하고, 부채 비용을 12퍼센트에서 14퍼센트로 바꾸면, 거래의 전체 구조가 눈앞에서 재계산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예전에 몇 주, 며칠씩 걸리던 일이 이제는 몇 시간, 몇 분이면 끝났다. 후다이유 인수에서 통한 방식을 이제 훨씬 더 큰 규모로 시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KKR은 비지캘크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본 기업 중 하나였다. KKR의 한 임원이 아들과 함께 가정용 컴퓨터를 구경하러 갔다가 판매 직원이 애플 II에서 비지캘크의 위력을 시연해 보이자 그 자리에서 매료되어, 즉시 KKR 사무실용으로 애플 II를 구입했다. 훗날 KKR은 로터스로 업그레이드했고, 결국에는 엑셀로 넘어갔다. 80년대에 등장한 다른 모든 사모펀드들, 그러니까 블랙스톤, 칼라일, 베인 캐피털도 똑같이 했다.

하지만 전자 스프레드시트를 가장 많이 활용한 인물은 아마도 그 시대 최고의 금융 공학자였던 마이클 밀컨6이었을 것이다. 고수익 채권 시장을 완벽하게 장악한 밀컨은 그 십 년의 LBO 중 막대한 비중에 자금을 댔고, 그 모든 것을 스프레드시트로 추적했다. 밀컨은 비버리힐스 사무실에 X자 모양의 트레이딩 데스크를 두고 그 위에 개인용 컴퓨터들을 늘어놓았는데, 각 컴퓨터에는 채권 가격과 소유 현황, 모든 대상 기업의 현금 흐름, 그리고 진행 중인 모든 거래의 상태를 추적하는 스프레드시트가 가득했다. 훗날 그 시절의 전례 없던 금융 활동을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자, 밀컨은 이렇게 말했다. 진짜 주범은 비지캘크를 만든 사람들이라고.

“진짜 주범은 비지캘크를 만든 사람들이다.” — 마이클 밀컨

엑셀 윈도우 3.0 광고
엑셀 윈도우 3.0 광고. (출처: Flickr)

스프레드시트처럼 보기…7

스프레드시트는 금융 공학자들에게 명백한 이유에서 유용했다. 계산 속도가 극적으로 빨라진 덕분에 훨씬 더 많은 계산을 수행하고, 더 야심찬 모델을 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사모펀드와 투자은행의 일상은 엑셀의 기능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전자 스프레드시트가 사모펀드를 가능하게 했다는 밀컨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모펀드에 인수된 기업들에게 이것이 좋은 일이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차입 매수(LBO)는 관여한 기업들의 상당수를 죽음으로 몰았다. KKR이 1979년에 인수한 자동차 부품 제조사 후다이유(Houdaille)는 LBO로 인한 부채가 주된 원인이 되어 1987년 해체되었다.)

그러나 스프레드시트의 파급 효과는 사모펀드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곳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스프레드시트는 한 세대 전체의 관리자와 기업 리더들 사이에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을 숫자와 수식으로 이루어진 행과 열로 담아낼 수 있다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실제로 굳혀 놓았기 때문이다. ‘통제 혁명’의 기술들이 기업을 관리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키웠다면, 스프레드시트는 기업을 최적화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키웠다. 즉, 기업을 자산과 부채와 계약의 묶음, 곧 “계약의 집합체”로, 그것도 스프레드시트 한 장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무언가로 보게 한 것이다. 비지캘크(VisiCalc)와 로터스 1-2-3, 엑셀이 기업을 바라보는 재무적 시각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시각을 겉보기에 중립적인 언어 속에 담아냄으로써, 그것을 보편적인 상식으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 결과 스프레드시트 혁명은 미국 기업 사회 구석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스프레드시트 덕분에 기업 리더들은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훨씬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게 되었고, 포드 에드셀 같은 특이한 계산 착오를 범할 가능성도 낮아졌다. 그러나 스프레드시트는 드러내는 것만큼이나 가리는 것도 많았다. 위대한 기업을 만드는 어떤 것들은 파악하기 어렵고, 수치화할 수 없으며, 때로는 순수한 재무 논리에 정면으로 배치되기도 한다. 가장 훌륭한 기업들은 자산의 묶음이라기보다 오히려 종교 집단이나 군대에 가까운 방식으로 움직인다.

그런 이해는 스프레드시트에 담을 수 없다. 그러나 스프레드시트를 쓰면, 기업을 순전히 재무적 실체로 표현하기가 매우 쉬워진다. 그것이 과연 훌륭한 기업을 번성하게 만드는 요소를 가장 잘 표현한 방식이었을까? 사실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스프레드시트의 건조한 논리, 곧 숫자가 지닌 단순한 설득력은 논쟁에서 이기는 데 매우 효과적인 수단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1980년대 이후 수많은 미국 기업들이 스프레드시트의 논리에 따라 재편되었다. 보잉, 제너럴 모터스, 제너럴 일렉트릭, 3M, IBM, 인텔이 그 예다. 이 모든 사례에서 우리는 공통된 패턴을 목격한다. ‘재무통들’의 부상, 생산의 외주화와 해외 이전, 설비 투자보다 우선시되는 자사주 매입과 특별 배당, 분기 실적 목표의 집요한 추구, 과학 연구개발 예산의 공동화, 그리고 끝없는 재무 최적화 속에서 공학·제조 역량이 꾸준히 약화되어 가는 흐름이다. 스프레드시트의 논리로 보면, 보잉 같은 기업이 핵심 부품의 설계와 제조를 전 세계 공급업체에 맡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스프레드시트는, 보잉 엔지니어들이 축적한 시스템 통합 지식이나 엄청나게 복잡한 제조 공정을 조율하는 조직적 역량을 포착할 수 없었다.

결국 보잉은 시간이 흐르면서 재무적으로는 최적화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속이 텅 빈 기업이 되었다. 스프레드시트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최초의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광고 — Going Concern
최초의 마이크로소프트 엑셀 광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만큼 선견지명이 담겨 있었다. (출처: Going Concern)

…그리고 AI처럼 보기

그리고 이 이야기는, 필연적으로, AI로 이어진다.

ATM과 아이폰을 다룬 지난 글에서 나는 AI의 영향이 주로 AI 패러다임에 맞게 처음부터 설계된 조직으로부터 비롯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내 생각에 사람들은, 인간 중심의 조직 안에서 한 명의 개별 기여자처럼 일하는 인공지능의 힘은 다소 과대평가하는 반면, 인간이 아닌 AI 역량을 중심으로 구축된 조직에서 수많은 인공지능이 함께 해낼 수 있는 일은 극적으로 과소평가하고 있다. 미래의 기업에서는 대부분의 기능을 AI 시스템이 운영하고, 인간은 감독과 방향 설정이라는 몇 가지 핵심 역할만 맡게 될 것이다. 극단적으로는 인간이 전혀 없는 기업도 등장할지 모른다.

하지만 AI 시스템이 아직 인간 중심의 조직 안에 끼워 맞춰지는 동안, AI는 스프레드시트가 그랬듯 기업에 유용할 것이다. 정보를 처리하고 행동을 조율하는 능력을 극적으로 끌어올리는 도구로서 말이다. 기업들은 정형화되지 않은 정보의 혼돈, 즉 고객 불만과 서비스 콜, 내부 이메일과 슬랙 스레드, 회의 녹취와 엔지니어링 사후 검토 보고서, 영업 통화 녹음까지 모두 끌어모아 많은 경우 처음으로 진정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보 처리와 행동 조율의 비용이 낮아지면서, 기업들은 전례 없이 훨씬 더 커지고, 더 중앙집권화되고, 더 야심차게 성장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크 저커버그는 현재 “그가 보통 여러 사람을 거쳐야 얻을 수 있는 답변을 직접 가져다주는” 일을 주로 담당할 “CEO 에이전트”를 구축하고 있다. 몇 년 후를 상상해 보면, 정보의 검색·요약·맥락화는 물론 명령 실행까지 능숙하게 해내는 훨씬 더 강력한 AI 시스템을 그릴 수 있다. 대부분의 기업을 규정해 온 위계 구조가 점차 더 수평적이면서도 더 절대주의적인 형태로 변모해 가는 모습도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어쩌면 수많은 ‘마크 저커버그 에이전트’ 군단이, 어떤 인간 관리자나 감독자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오로지 마크 저커버그의 의지를 실행하는 데만 헌신하는 세상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스프레드시트가 기업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을 강요했듯이, AI도 그것만의 방식을 강요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통제 혁명의 경영 이데올로기는 기업을 통치의 대상인 조직으로 보았고, 재무 이데올로기는 기업을 최적화해야 할 자산과 현금흐름의 묶음으로 보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AI 이데올로기는, 내 생각에, 기업을 거대한 가시적 워크플로 네트워크로 볼 것이다. ‘직무’가 ‘업무’로, 다시 ‘하위 업무’로 잘게 분해되고, 살아 있는 유기체 전체가 그 어떤 과거의 정보 기술도 해내지 못했던 방식으로 위에서 투명하게 들여다보이고 조작되는, 그런 네트워크로 말이다.

이는 조직이, 특히 최고의 조직들이 이룰 수 있는 것을 진정으로 놀라운 수준으로 끌어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전의 각 기업 이데올로기가 기업의 성격과 잠재력에 관한 실질적인 무언가를 조명했듯이, 각각은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기업을 변질시키기도 했다. 재무 이데올로기는 수치화할 수 없는 것에 눈이 멀었다. 그리고 AI 이데올로기는, 내 생각에, 워크플로로 가시화할 수 없는 것에 눈이 멀게 될 것이다.

위대한 기업은 재무제표나 워크플로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목적을 향해 특정한 사람들을 모으고 조직하는 일에서 나오는 어떤 환원 불가능한 무언가 때문에 위대하다. 그리고 IBM이든 애플이든, 모든 위대한 기업은 어느 시점에는 황금기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정신을 잃어버린다. 기업의 일상이 AI 시스템에 점점 더 지배될수록, 조직 생활에서 가장 포착하기 어렵고 가장 인간적인 요소들이 평가절하되고, 많은 조직에서는 아예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우려된다. AI는 스프레드시트가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멀리 볼 것이다. 놀라운 일들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어마어마하게 야심찬 규모의 노동과 자본 조율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경고: 기업 전체를 재편할 만큼 강력한 도구는,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을 파괴할 만큼 강력하기도 하다.

역주

  1.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경기 침체(stagnation)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이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 통상적으로 경기가 나쁘면 물가도 안정되지만, 1970년대 미국은 두 악재가 겹쳐 경제정책이 무력해진 전례 없는 상황이었다.
  2. 폴 볼커(Paul Volcker, 1927–2019): 1979~1987년 연방준비제도(Fed) 의장. 두 자릿수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연 20%까지 끌어올리는 초강경 긴축을 단행했다. 단기적으로 극심한 불황을 불렀지만 결국 인플레이션을 꺾어냈으며, 이후 1980년대 금리 하락의 발판을 닦았다.
  3. 차입 매수(LBO, Leveraged Buyout): 인수 대금의 대부분을 차입금으로 조달하여 기업을 사들이는 방식. 인수 대상 기업의 자산과 현금흐름을 담보로 삼아 레버리지를 극대화한다. 성공 시 소액의 자기자본으로 막대한 수익을 거둘 수 있지만, 과도한 부채로 인해 기업이 파산에 이르는 사례도 많다.
  4. KKR(Kohlberg Kravis Roberts): 1976년 설립된 미국 사모펀드의 선구자. 제롬 콜버그, 헨리 크래비스, 조지 로버츠가 공동 창업했다. 1988년 RJR 나비스코를 250억 달러에 인수한 사건은 당시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 인수로 화제가 됐으며, 『문 앞의 야만인들(Barbarians at the Gate)』이라는 책과 영화로도 제작됐다.
  5. 후다이유(Houdaille Industries): 미국 자동차 부품·기계 제조업체. KKR이 1979년 자기자본 100만 달러로 3억 5,500만 달러 규모의 이 회사를 인수한 거래는 현대 사모펀드 LBO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LBO로 인한 과중한 부채를 견디지 못하고 1987년 해체됐다.
  6. 마이클 밀컨(Michael Milken, 1946–): ‘정크본드의 왕’으로 불린 금융가. 드렉셀 번햄 램버트(Drexel Burnham Lambert) 투자은행에서 고수익(정크) 채권 시장을 사실상 혼자 개척하여 1980년대 LBO 붐의 자금줄이 됐다. 1990년 증권사기·공모 등 증권법 위반으로 유죄를 인정하고 2년 복역했으며, 드렉셀 번햄 램버트는 같은 해 파산했다.
  7. 제목 “스프레드시트처럼 보기”는 제임스 C. 스콧(James C. Scott)의 1998년 저서 『국가처럼 보기(Seeing Like a State)』를 의식적으로 차용한 것이다. 스콧의 책은 국가 권력이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가시화하는 방식(가독성, legibility)이 어떻게 사회공학적 실패로 이어지는지를 분석했다. 저자는 스프레드시트, 그리고 AI 역시 같은 방식으로 현실을 납작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논지를 제목에 담았다.

원문: How the Spreadsheet Reshaped America — David Oks, Chartbook Adjacent (2026년 3월 26일)

생성: Claude (Anthropic)

총괄: (디노이저denoi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