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은 재능이 아니라 기술이에요
핵심 요약
취향은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익힐 수 있는 기술이라는 이야기예요. 프로덕트 리더 Ravi Mehta가 잭슨 폴록의 경력 전환에서 출발해, 취향이 무엇이고 어떻게 기르는지, 그리고 AI가 그 과정을 어떻게 흔드는지 짚어 봐요.
- 객관적으로 좋은 취향은 없어요. 좋은 선택이냐 아니냐는 누구를 위해 골랐느냐에 달려 있어요. 개인적 취향, “좋은 취향”, 대중적 취향은 서열이 아니라 향하는 관객이 다를 뿐이고요.
- 취향은 창작보다 큐레이션에 가까워요. 고르는 일보다 무엇을 고를 수 있는지 아는 게 먼저예요. 선택지의 지형을 얼마나 넓게 보느냐가 곧 취향의 크기고요.
- 취향과 솜씨는 달라요. 취향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아는 것, 솜씨는 그걸 실제로 만들어내는 능력이에요. AI가 문턱을 낮춘 만큼 이 구분은 오히려 더 중요해졌고요.
- 취향은 크리틱으로 자라요. 내가 좋아하는 것과 관객이 좋아하는 것을 2×2로 놓아 보세요. 어긋나는 두 칸을 파고들다 보면 취향 근육이 붙어요.
- AI에게 넘길 것과 넘기지 말 것: 탐색에는 과감하게, 결정에는 조심스럽게. 결정을 통째로 넘기면 결과물은 슬롭이 되고, 탐색에만 쓰면 오히려 가능성의 공간이 넓어져요.
AI 시대에는 취향이 필수라고 다들 말하죠. 그런데 그 취향이란 정확히 뭐고, 내 취향은 어떻게 길러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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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은 경력의 정점에 있었어요.
드립 페인팅 덕분에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 되어 있었죠. 폴록은 정말 드문 일을 해낸 사람이었어요. 살아 있는 동안 비평가들의 인정과 상업적 성공을 동시에 손에 넣었으니까요. (혁신적인 예술가가 생전에 상업적 성공을 거두기가 왜 그렇게 어려운지는 뒤에서 살펴볼게요.)

그런데 폴록이 방향을 틀었어요.
훗날 블랙 푸어링이라고 불리게 되는 작업을 시작한 거예요.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알록달록하고 혼란스러운 그림들에 비하면 훨씬 어둡고, 형상이 더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림들이었어요. 폴록 본인은 자신 있게 새로운 창작의 장으로 들어섰지만, 관객은 그만큼 확신하지 못했죠.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고, 이전 작업을 반겼던 비평가와 컬렉터 상당수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어요.

폴록은 갑자기 취향을 잃어버린 걸까요?
그건 딱 맞는 질문이 아니에요.
달라진 건 그의 예술적 비전이었고, 관객의 취향은 거기에 맞춰 달라지지 않았을 뿐이거든요.
이 차이를 파고들면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취향의 본질이 보여요. 우리는 취향을 마치 객관적인 성질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하죠. 누구는 “좋은 취향”을 가졌다고 하고, 또 누구는 “나쁜 취향”을 가졌다고 하고요.
하지만 제 생각은 이래요. 객관적으로 좋은 취향 같은 건 없어요.
취향은 결국 가능성의 지형 위에서 무언가를 골라내는 일이에요. 그리고 그 선택이 좋으냐 아니냐는 누구를 위해 골랐느냐에 달려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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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은 큐레이션이에요
창작을 떠올릴 때 우리는 만들어내는 행위에 눈이 가요. 문장을 쓰고,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고, 곡을 짓고, 프로덕트를 디자인하는 그 순간 말이에요.
그런데 저는 취향이 창작보다는 큐레이션에 가깝다고 봐요.
취향이란 여러 가능성을 펼쳐놓고 그중 어느 것이 맞는지 결정하는 과정이거든요.
그러니까 취향에서 가장 중요한 일 하나는 뭔가를 고르기도 전에 이미 일어나요. 선택지의 지형을 먼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거죠.
취향이 잘 다듬어진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눈앞에 놓인 의자 다섯 개 중에서 제일 나은 걸 집는 데 그치지 않아요. 애초에 맞는 의자가 그 다섯 개 안에 있기는 한지 판단할 만큼 가능성의 공간을 훤히 꿰고 있거든요.
글쓰기, 디자인, 영화, 음식, 프로덕트, 그 밖의 거의 모든 창작 영역이 다 마찬가지예요.
취향은 그냥 고르는 게 아니에요. 무엇을 고를 수 있었는지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 정하고, 그 결정들을 큐레이션해서 맞다고 느껴지는 결과물로 만들어내는 일이에요.
그런데 누구에게 맞다는 걸까요?
내 취향이 흠잡을 데 없는 이유
취향을 하나의 스펙트럼 위에 놓고 생각해 볼까요. 그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는 개인적 취향, 그러니까 “단 한 사람을 위한 취향”이 있어요. 창작자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만들 수 있는 거죠. 거실에 걸어 둘 그림을 고르거나 사진을 찍는다고 상상해 보세요. 여기서 중요한 취향은 내 취향뿐이에요. 내 선택이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거든요.
반대쪽 끝에는 대중적 취향이 있어요. 수백만 명의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능력이죠.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우리가 흔히 “좋은 취향”이라고 부르는 게 있어요.
“좋은 취향”이란 결국 비교적 소수인 취향 결정자들의 선호일 뿐이에요. 어떤 선택이 좋고 나쁜지 판정할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들이죠. 미술관 큐레이터. 패션 에디터. 레스토랑 평론가. 영화 평론가. 디자인계의 리더들.
그 취향은 그들이 내가 닿으려는 관객일 때 비로소 중요해져요. 대개는 훨씬 더 큰 관객으로 가는 길목을 그들이 지키고 있어서 그렇고요.
미쉐린 별을 노리는 셰프라면 내 취향이 미쉐린 심사관의 취향과 얼마나 겹치는지가 아주 중요해요. 평단의 호평을 주된 목표로 영화를 만든다면 영화 평론가들의 선호가 중요하고요. 안목 높은 디자인 관객을 위해 뭔가를 만든다면 그 디자인 커뮤니티의 관습과 감수성이 중요하겠죠.
하지만 그중 어떤 취향도 대중적 취향이나 개인적 취향보다 본질적으로 더 정당하지는 않아요.
평론가와 폭넓은 관객의 의견이 맞아떨어질 때도 있어요. 안 그럴 때도 있고요. Rotten Tomatoes 같은 사이트에 가 보면 그 간극이 대놓고 보여요. 평론가 점수와 관객 점수가 완전히 다른 영화를 평가한 것처럼 보이거든요.
수백만 명이 사랑하는 무언가를 만드는 게 목표라면 평론가의 취향은 아무 상관이 없을 수도 있어요. 중요한 건 내가 닿으려는 관객의 취향이에요.
취향은 솜씨가 아니에요
사람들은 취향과 솜씨 (craft)를 자주 뒤섞어서 이야기하는데, 이 둘은 서로 달라요.
취향은 내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아는 거예요. 솜씨는 그걸 실제로 만들어내는 능력이고요.
취향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사랑하는 영화가 있고, 자꾸 다시 듣게 되는 음악이 있고, 감탄하며 쓰는 프로덕트가 있고, 남한테 추천하는 식당이 있잖아요. 소비자로 사는 동안 우리는 뭐가 좋고 뭐가 별로인지 쉴 새 없이 판단을 내려요.
하지만 자기 취향의 기준에 닿는 것을 실제로 만들어낼 솜씨까지 갖춘 사람은 많지 않아요.
저는 영화를 보고 이건 정말 좋다고 느낄 수 있어요. 그렇다고 제가 훌륭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죠. 아름답게 디자인된 의자를 알아볼 수는 있어도 그걸 설계하거나 짜는 법은 몰라요. 훌륭한 곡을 알아들으면서도 정작 그런 곡을 쓰지는 못하고요.
소비자와 창작자를 가르는 지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예요.
취향은 강한데 솜씨는 부족한 사람은 훌륭한 비평가가 될 수 있어요. 주변 세계를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무엇이 잘된 것인지 알아보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탁월한 것과 그저 그런 것을 갈라낼 줄 아는 사람이죠.
창작자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요. 세상에 이런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림이 머릿속에 있고, 그걸 진짜로 있게 만들고 싶어 하거든요. 상상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만들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을 얼마나 좁히느냐는 솜씨에 달려 있어요.
창작이 그토록 사람 속을 태우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내 취향이 그걸 실행할 능력보다 앞질러 자라 버리곤 하거든요. 내가 만든 게 뭔가 아니라는 건 아는데, 제대로 만들 기술은 아직 없는 거죠.
그리고 이게 AI에서 가장 신나는 지점 중 하나예요.
AI는 솜씨의 문턱을 극적으로 낮춰요.
일러스트를 한 번도 배운 적 없는 사람이 이미지를 만들기 시작해요. 코딩을 못 하는 사람이 소프트웨어를 만들고요. 음악을 듣는 귀는 있지만 악기를 익히지 못한 사람이 작곡을 시작해요. 예전에는 무언가를 상상할 취향은 있어도 그걸 실현할 솜씨가 없던 사람들이, 이제 그 간극을 좁혀나갈 수 있게 된 거예요.
솜씨가 대중화될 때마다 완전히 새로운 창작자 계층이 태어나요. 지금까지 여러 번 그랬고, AI는 그 흐름의 가장 최근 단계일 뿐이죠. 오늘날 가장 많은 사람이 보는 감독이 Steven Spielberg가 아니라 Mr. Beast인 것도 그래서고요.
AI는 솜씨의 문턱을 낮추지만, 그러면서 취향과 솜씨의 구분은 오히려 더 중요해져요. 창작자가 이렇다 할 기여를 하지 않아도 AI가 알아서 만들어내 버리니까요.
지금 우리 앞에 놓인 기회는 이래요. AI를 써서 상상할 수 있는 것과 만들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극을 좁히되, 그 결과물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정하는 결정만큼은 계속 내가 내리는 거죠.
취향이 강한 창작자는 AI를 써서 예전에는 솜씨가 없어 못 만들던 것을 만들 수 있어요. 반면 그 결정들을 AI에게 넘겨버린 창작자는 자기 능력 밖의 것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나온 결과물에는 창작자의 취향이 담기지 않아요. 앞으로 보겠지만, 슬롭 (slop)T1은 바로 이렇게 취향이 빠져 버린 자리에서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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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 근육은 크리틱으로 키워요
취향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계속 캐물으면서 자라나요. 그 과정을 흔히 크리틱T2이라고 부르죠.
크리틱이라고 하면 판정처럼 들려요. 이게 좋은지 나쁜지를 가르는 일 같잖아요. 그런데 쓸모 있는 크리틱은 사실 질문을 던지는 과정이에요.
- 나는 이것의 어떤 점이 좋은가?
- 왜 좋은가?
그다음엔 이렇게 물어요.
- 다른 사람들도 이걸 좋아하는가?
- 나는 그들이 왜 좋아한다고 생각하는가?
이건 간단한 2×2 매트릭스로 정리해볼 수 있어요.
긍정적 일치
나도 좋아하고 관객도 좋아하는 것들이 있어요. 그게 바로 일치예요. 무엇이 좋은지 가늠하는 내 직감이 관객의 직감과 겹치는 거죠.
폴록의 드립 페인팅에서는 예술가의 비전과 관객이 갈망하던 것이 그렇게 맞아떨어졌어요. 이런 일은 드물어요. 혁신적인 예술가는 관객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비전을 품고 있을 때가 많고, 관객이 그 비전을 알아보기까지는 시간이, 때로는 한평생이 걸리거든요. 반 고흐가 무일푼으로 죽었는데도 그의 작품이 오늘날 가장 비싼 축에 드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부정적 일치
나도 싫어하고 관객도 싫어하는 것들이 있어요. 여기서 배울 건 딱히 없을 거예요. 더 말할 것도 없죠.
흥미로운 건 나머지 두 사분면이에요.
관객과의 불일치
관객은 좋아하는데 나는 안 좋아하는 것들이 있어요. 취향을 키울 때 파고들 가치가 가장 큰 사분면이 아마 여기일 거예요. 쉬운 반응은 이거죠. 사람들 취향이 별로네. 쓸모 있는 반응은 이거고요. 저 사람들은 내가 못 느끼는 뭘 느끼고 있는 걸까?
내 눈엔 그저 그랬던 영화가 왜 신드롬이 됐을까요? 이 프로덕트는 왜 사람들 마음을 움직일까요? 이 식당 앞에는 왜 골목을 한 바퀴 두르는 줄이 서 있을까요? 문체가 거슬리기만 하던 이 글은 왜 여기저기 공유될까요?
목표는 나를 설득해서 그걸 좋아하게 만드는 게 아니에요.
목표는 내가 머릿속에 그린 관객과 실제 관객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거예요.
창작자와의 불일치
그다음엔 나는 좋아하는데 관객은 안 좋아하는 것들이 있어요.
이 어긋남도 똑같이 중요해요.
내 감각 중에 어떤 부분이 가닿지 않는 걸까요? 발상 자체가 별로인가요? 표현이 서툰 건가요? 아니면 그냥 이 관객에게 안 맞는 걸까요?
아니면 그들이 아직 음미할 줄 모르는 무언가를 내가 먼저 보고 있는 걸까요?
이 마지막 가능성이 중요한 데는 이유가 있어요. 창작에서 가장 흥미로운 돌파구는 만드는 사람이 한발 앞서 있을 때 터져 나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관객이 아직 겪어 보지 못한 취향을 먼저 품고 있는 거죠.
폴록의 드립 페인팅부터가 관객에게 어떤 그림을 사고 싶은지 물어봐서 나온 게 아니었어요. 그의 개인적 감각이 아무도 가보지 않은 쪽으로 뻗어 나갔고, 미술계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거기까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죠.
폴록이 받은 반응은 반 고흐의 경우와는 아주 달랐어요. 반 고흐는 경력의 상당 기간을 외면 속에 보냈고, 그러다 결국 절망에 빠졌으니까요.
이게 창작이 안고 있는 괴로운 긴장이에요.
남들이 좋아하는 쪽으로 너무 기울고 내가 좋아하는 쪽을 소홀히 하면, 개인적인 취향 감각을 잃어버려요. 내가 만든 것에 나다움을 남겨 주는 게 바로 그 감각인데 말이죠.
관객을 아예 무시하면, 나 혼자만 음미할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게 될 수도 있고요.
결국 취향은 그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하는 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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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창작 과정에서 취향을 걷어낼 수 있어요
취향이 갑자기 이렇게 중요한 주제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 있어요.
AI는 그 이전에 나온 거의 모든 창작 도구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거든요.
AI는 창작상의 결정을 실행하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그 결정을 대신 내려줄 수도 있죠.
워드프로세서는 글쓰기를 편하게 해주지만, 무슨 주장을 펼칠지까지 정해주지는 않아요. 포토샵은 디자이너에게 엄청난 능력을 쥐여주지만, 구성과 위계, 색, 타이포그래피, 이미지에 관한 결정은 여전히 디자이너의 몫이고요.
생성형 AI는 그 둘을 다 떠맡을 수 있어요.
AI에게 글을 써달라고 하면 논지도, 구조도, 사례도, 문장도, 연결도, 어휘도 AI가 고를 수 있어요. 랜딩 페이지를 디자인해달라고 하면 레이아웃, 위계, 카피, 색, 이미지, 행동 유도 문구, 여백, 시각 언어까지 전부 AI가 고를 수 있죠.
그런데 취향은 바로 그런 선택 하나하나에 깃들어요.
그래서 창작자가 자기 취향을 얹지 않은 채 그 결정들을 너무 많이 AI에게 맡겨버리면, 결과물에서 슬롭 티가 나기 시작해요.
그럼 슬롭은 그냥 한때의 문제 아닐까요? 모델이 충분히 좋아지면 슬롭도 옛말이 되지 않을까요?
아니요, 절대로요! AI는 언제나 슬롭을 만들어낼 거예요. 왜 그런지 한번 보죠.
모델은 계속 좋아지고, 그래서 기본값도 계속 좋아져요.
하지만 더 나은 기본값도 여전히 기본값이에요.
요즘 글에서는 그 기본값이 티가 확 나요. 사방에 박힌 엠 대시T3, 부정으로 대구를 맞추는 문장, 지나치게 말끔한 수사 구조, 뭐든 셋으로 깔끔하게 묶어내는 버릇 같은 것들요.
AI가 만든 이미지에서는 티가 좀 다르게 나요. 과하게 공들인 일러스트 느낌, 겉보기엔 매끈하지만 깊이 고민한 흔적은 없는 구성, 뻔한 조명과 색과 배치 같은 것들이죠.
이런 구체적인 티들은 바뀔 거예요.
그 밑에 깔린 문제는 안 바뀌고요.
슬롭은 한 번도 따져보지 않은 기본값이 쌓인 결과예요.
관객의 취향도 예술가의 취향처럼 변해가요. 한때 “우와”였던 것도 관객이 너무 많이 보고 나면 “뭐 그냥”이 되죠. (솔직히 말하면 요즘 AI가 쓴 글은 꽤 괜찮아요. 문제는 품질이 아니라 익숙함이에요.)
AI의 위험은 작업을 외주 주는 데 있지 않아요. 결정을 외주 주는 데 있죠. 관객이 이미 질려버린 것을 만들어내는 함정에 빠지는 데 있고요.
AI는 창작 과정에서 취향을 키워줄 수도 있어요
AI를 쓰는 다른 방법도 있어요.
취향이 큐레이션이라면, AI는 큐레이션할 대상을 훨씬 더 풍성하게 늘려줄 수 있거든요.
작가는 도입부 두 개를 붙들고 끙끙대는 대신 스무 개를 탐색해볼 수 있어요. 디자이너는 완전히 다른 다섯 가지 비주얼 방향을 순식간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요. 프로덕트 빌더는 하나로 결정하기 전에 인터랙션을 여러 방식으로 프로토타이핑해볼 수 있죠.
AI는 가능성의 공간을 더 넓혀줄 수 있어요.
단, 고르는 사람 자리를 여러분이 끝까지 지킬 때만요.
나쁜 워크플로는 이래요.
요청 → 생성 → 수용.
더 나은 워크플로는 이렇고요.
프레이밍 → 탐색 → 크리틱 → 다시 탐색 → 선택 → 다듬기.
헤드라인을 스무 개 뽑았는데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을 수도 있어요.
그것도 정보예요.
스무 개가 전부 같은 발상 언저리에서만 맴돌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완전히 다른 방향을 요구하는 것, 그게 취향이에요.
AI가 나무랄 데 없이 잘 쓴 문단을 내놨는데도 결국 다시 쓰게 되는 경우도 있어요. 기술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죠. 그냥 내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을 뿐이에요.
그것 역시 취향이에요.
여기서 얻을 교훈은 AI를 덜 쓰라는 게 아니에요.
탐색에는 AI를 과감하게 쓰고, 결정에는 조심스럽게 쓰라는 거죠.
AI가 가능성의 공간을 넓히게 두세요. 여러분이 미처 떠올리지 못했을 방향을 보여주게 두세요. 어디로 가고 싶은지 정해진 뒤에는 그 선택을 실행하게 맡기고요.
하지만 결과물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를 AI가 슬그머니 정해버릴 때는 조심하셔야 해요. 바로 그때 AI의 평균값이 여러분 개인의 취향 감각을 갉아먹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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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랑하는 프로덕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몇 년째 제가 가장 좋아하는 프로덕트 면접 질문은 놀랄 만큼 단순해요.
당신이 사랑하는 프로덕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질문을 천 명이 넘는 사람에게 던져 봤어요. 여기서 출발하면 누구와도 5분을 이야기할 수도, 한 시간을 이야기할 수도 있죠.
- 그 프로덕트의 어떤 점을 사랑하나요? 왜죠?
- 만든 사람들이 잘해낸 건 뭔가요?
- 어떤 결정이 마음에 드나요?
- 그들이 누구를 위해 만들었다고 생각하세요?
- 당신이라면 뭘 바꾸겠어요?
다른 어떤 질문보다도 이 질문 덕분에 상대가 프로덕트 매니저 / 프로덕트 빌더로서 어떤 가능성을 지녔는지 가늠할 수 있었어요. 그 사람의 취향이 그대로 들여다보이거든요.
그런데 그 대화에서는 다른 일도 함께 벌어지고 있었어요.
제 취향도 자라고 있었거든요.
지원자들은 하나같이 제가 접해 보지 못했을 프로덕트를 알려 주거나, 익숙한 프로덕트에서 제가 못 봤던 무언가를 짚어 줬어요. 그들의 열정 앞에서는 묻지 않을 수 없었죠. 때로는 제 눈에 별것 아니었던 것에서 저 사람들은 대체 뭘 본 걸까 하고요.
취향은 그렇게 자라요. 무엇이 좋은지 규칙으로 외워서가 아니고요. 취향 결정자로 추대된 사람들을 흉내 내서도 아니에요. 그리고 AI에게 대신 골라 달라고 해서는 더더욱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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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을 기른다는 건 세상과 나누는 대화예요
취향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어요. 강력한 AI 도구가 우리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그 개인적인 감각을 끊임없이 대신하려 들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닿고 싶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기쁘게 할 만한 날카로운 관점을 기르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요.
취향은 누구는 타고나고 누구는 못 타고나는 마법 같은 게 아니에요. 누구든 자기 취향을 조금씩 계속 다듬어 갈 수 있어요.
뭔가를 경험해요. 내 반응을 알아차려요. 그 반응을 캐물어요. 그리고 내가 닿고 싶은 사람들의 반응과 견줘 봐요. 그러면서 내 감각이 그들과 어디서 겹치고 어디서 갈라지는지 알게 돼요.
그다음엔 뭔가를 만들어요.
그걸 다시 세상에 내놓고…. 대화는 계속돼요.
역자 주
- 슬롭(slop): 원래 가축에게 주는 멀건 죽이나 음식물 찌꺼기를 가리키는 말이에요. 2024년 무렵부터 영어권에서 “생성형 AI가 대량으로 쏟아내는, 틀리진 않았지만 아무도 공들여 만들지 않은 콘텐츠”를 부르는 멸칭으로 자리 잡았어요. 스팸이 “원치 않은 것”이라면 슬롭은 “영혼 없이 채워 넣은 것”에 가깝다는 어감이 있어요. ↩
- 크리틱(critique): 미술·디자인·건축 학교에서 작업을 벽에 걸어 놓고 다 같이 뜯어보는 수업을 가리키는 말이에요. 우리말 “비평”이 결과물에 점수를 매기는 뉘앙스라면, 크리틱은 “왜 이렇게 만들었는지”를 캐묻는 과정 그 자체를 뜻해요. 저자가 굳이 이 단어를 쓴 것도 그래서예요. ↩
- 엠 대시(em dash, —): 알파벳 M의 폭만큼 긴 줄표예요. 영어 글에서 문장 흐름을 끊고 덧말을 끼워 넣을 때 쓰는데, 챗GPT류가 유난히 자주 쓴다는 이유로 “AI가 쓴 글”을 알아보는 대표적인 단서가 됐어요. 이어서 나오는 “부정으로 대구를 맞추는 문장”은 “It’s not X, it’s Y”처럼 앞을 부정하고 뒤를 내세우는 구문으로, 역시 AI 글의 흔한 버릇이에요. ↩
저자 소개: Ravi Mehta는 Tinder의 최고 프로덕트 책임자를 지낸 프로덕트 리더로, 뉴스레터 Ravi on Product에서 프로덕트 매니지먼트와 커리어에 관한 글을 씁니다.
참고: 이 글은 Ravi Mehta가 Ravi on Product에 게시한 아티클을 번역한 것입니다.
원문: Taste is a skill, not a gift — Ravi Mehta, Ravi on Product (2026년 8월 27일)
생성: Claude (Anthrop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