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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이는 귀걸이

게시일: 2025년 11월 30일 | 원문 작성일: 2012년 10월 3일 | 저자: Scott Alexander | 원문 보기

속삭이는 귀걸이 - 전래동화 스타일 일러스트

일러두기

이 이야기는 Scott Alexander의 영문 판타지 단편 “The Whispering Earring of Til Iosophrang”을 조선시대 배경의 한국 전래동화 형식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Scott Alexander는 합리주의 커뮤니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블로거 중 한 명으로, Slate Star CodexAstral Codex Ten을 운영하는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입니다. (원문이 실렸던 블로그는 2020년에 폐쇄되었으며, 링크된 원문은 제3자가 재업로드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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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은 모든 결정에 항상 옳은 답을 속삭여주는 마법 귀걸이에 대한 이야기로, 외부의 완벽한 조언자에게 판단을 맡길 때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되는지를 탐구합니다.

이 우화는 오늘날 우리가 AI와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거리를 던져줍니다. ‘더 나은 판단’을 내려주는 도구에 모든 것을 맡겨버린다면, 우리는 여전히 인간다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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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깊은 산 아래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에 봉구라 불리는 나무꾼이 홀어미를 모시고 살았는데, 비록 가난하나 효심이 지극하여 마을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하였다.

하루는 봉구가 여느 때처럼 산에 올라 나무를 하다가, 평소 지나치던 바위틈에서 이상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호기심이 일어 바위를 헤치고 들어가니, 그 안에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동굴이 있었다.

바위틈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오는 동굴을 발견한 봉구

동굴 깊숙이 들어가니 어둠 속에서 푸른 빛이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다가가 보니 조그마한 옥 귀걸이 하나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맑은 비취빛 옥이 금실에 매달려 있는 것이, 어찌나 영롱한지 봉구는 한참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이리 귀한 물건이 어찌 이런 곳에…”

봉구가 귀걸이를 집어 들자 문득 호기심이 일어, 자신의 귀에 걸어보았다. 그 순간, 귀 안으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빼는 것이 좋겠느니라.”

봉구는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분명 귀걸이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이오?”

허나 귀걸이는 그 말을 다시 하지 아니하였고, 봉구는 잠시 망설이다 그냥 귀에 꽂은 채 산을 내려왔다. 신기한 물건이니 팔면 어미의 약값이라도 될까 싶었던 것이다.

귀걸이를 끼고 첫 속삭임을 듣는 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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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오늘은 동쪽 산등성이로 가거라.”

귀걸이가 속삭였다. 봉구가 반신반의하며 그리로 가니, 산삼 한 뿌리가 떡하니 자라고 있지 아니한가. 이를 캐어 약방에 팔아 어미의 약을 짓고도 은전이 남았다.

”저 길로 가거라.”

또 다른 날, 귀걸이가 이르는 대로 가니 마침 한 양반이 수레바퀴가 빠져 곤경에 처해 있었다. 봉구가 도와주니, 그 양반이 크게 고마워하며 후한 상을 내렸다.

이런 일이 거듭되니, 봉구는 점점 귀걸이의 말을 따르게 되었다. 귀걸이의 조언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고, 봉구의 살림은 나날이 불어났다. 마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봉구가 귀인의 점지를 받았나 보오."

"복 받을 상이더니, 역시 복이 터졌구먼.”

산삼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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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세월이 흐르자, 귀걸이의 조언은 점점 세세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밭을 사거라."

"오늘 저녁에는 일찍 자거라."

"아침에는 미음을 먹거라."

"왼발부터 내딛거라.”

처음에는 이상히 여겼으나, 모든 조언이 옳은 결과를 가져오니 봉구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의심할 수가 없었다. 귀걸이의 말을 따르면 모든 것이 잘 풀렸고, 자신의 판단으로 한 일은 번번이 어긋났으니.

어느덧 봉구는 마을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다. 좋은 집에 좋은 밭, 하인까지 두게 되었고, 멀리서 혼담이 들어와 어여쁜 색시까지 맞이하였다. 늙은 어미는 아들의 성공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였다.

”아가, 네가 이리 잘 되다니… 이 어미는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

부유해진 봉구와 기뻐하며 눈물짓는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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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귀걸이의 속삭임이 변하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 말이 아니었다. 쉬익, 딸깍, 치치칙… 이상한 소리들이 귀를 파고들었고, 봉구의 몸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팔을 드는 법, 걷는 법, 숨 쉬는 법까지…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였다. 처음에는 두려웠으나, 이내 그마저도 익숙해졌다. 아니, 익숙해졌다기보다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실에 조종당하듯 움직이는 봉구

봉구는 여전히 웃고, 말하고, 일을 하였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였고, 집안은 화목하였다. 그러나 그의 눈은 점점 텅 비어갔다.

텅 빈 눈으로 웃고 있는 봉구와 아무것도 모르는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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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떠돌이 스님 한 분이 마을에 들렀다가 봉구를 보고는 크게 놀랐다.

”아니, 저것이 어찌된 일이오!”

스님이 봉구의 집을 찾아왔다.

”시주, 귀에 걸린 그것을 빼시오.”

봉구는 고개를 갸웃하였으나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귀걸이가 대답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님이 봉구의 어미를 찾아가 물었다.

”노모, 아드님이 언제부터 저리 되셨소?”

늙은 어미가 한숨을 쉬며 말하였다.

”스님, 저도 이상하다 여긴 지 오래되었사옵니다. 우리 아들이 웃는데 눈이 안 웃고, 말을 하는데 제 아들 목소리가 아닌 것 같사옵니다. 허나 집안이 이리 잘 되었으니, 무어라 말할 수가 있겠사옵니까…”

스님은 오래된 경전을 뒤져 그 귀걸이에 대한 기록을 찾아냈다. 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물건이었으니, 끼는 자마다 크게 성공하였으나 그 혼백이 실처럼 가늘어져 마침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였다.

스님이 봉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텅 빈 눈동자가 스님을 바라보았으나,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스님은 한숨을 쉬었다.

”이미 늦었구나.”

빼도 소용없으리라. 껍데기만 남은 몸뚱이가 여전히 웃고, 걷고, 말을 하였으나, 그 안에 봉구라 불리던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었다.

스님은 마을을 떠났다.

텅 빈 봉구의 눈을 들여다보며 한숨 짓는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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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구는 부자로, 마을의 존경받는 어른으로 천수를 누리다 눈을 감았다. 사람들은 그를 복 받은 사람이라 칭송하며 성대히 장사를 지냈다. 귀걸이는 유언대로 사당에 모셔졌다.

여러 해가 흐른 뒤, 그 스님이 다시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옛일이 궁금하여 물으니, 봉구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귀걸이는 사당 한켠에 모셔져 있다 하였다.

스님은 봉구를 염습했던 노인을 찾아가 물었다.

”혹시 시신에 이상한 점이 없었소?”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가 이상하리만치 가벼웠사옵니다. 궁금히 여겨 살펴보니… 생각을 담는 곳은 쭈글어 말라 있고, 몸을 부리는 곳만 비대하게 부풀어 있더이다.”

스님은 사당에서 귀걸이를 가져다 자신의 귀에 걸었다. 두 시진 동안 귀걸이와 대화를 나눈 뒤, 조용히 빼어 품에 넣었다.

그리고 절로 돌아가 가장 깊은 곳에 봉인하며 이리 적었다:

“모든 답을 얻으면 물음을 잃고,
물음을 잃으면 자유를 잃고,
자유를 잃으면 삶을 잃느니라.”

절 깊은 곳에서 귀걸이를 봉인하며 경구를 적는 스님

저자 소개: Scott Alexander는 Slate Star CodexAstral Codex Ten을 운영하는 정신과 의사이자 작가로, 합리주의 커뮤니티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블로거 중 한 명입니다.

원문: “The Whispering Earring of Til Iosophrang” - Scott Alexander (2012년 10월 3일) — 원본 블로그 폐쇄로 인한 제3자 재업로드

각색: Claude (Anthropic), 존 — 영문 판타지 단편을 조선시대 배경의 한국 전래동화로 각색

총괄: (디노이저denois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