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창의적일 수 있을까요? 표절 기계와 앵무새를 넘어서
게시일: 2025년 11월 28일 | 원문 작성일: 2023년 7월 20일 | 저자: Advait Sarkar | 원문 보기
핵심 요약
- 지식 노동의 중심 이동 — ‘생산’에서 ‘비판적 통합’으로 변화 중이에요
- 창의성은 다차원적 — 과정, 의도, 해석, 재사용, 무작위성의 렌즈로 봐야 해요
- 저작권법의 한계 — 권력자 보호 도구일 뿐, 창의성 판단 기준이 아니에요
- 커뮤니티가 최종 심판관 — 사회적 합의가 표절과 창작을 가르는 진짜 기준
서론: AI 예술, 축복인가 재앙인가?
AI가 만든 이미지와 텍스트가 넘쳐나는 지금, “AI는 창의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철학자들만의 고상한 담론이 아니에요. 이 질문은 우리 모두의 일과 창작, 그리고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죠. 논쟁은 이미 시작됐어요.
2022년 10월, 일본 만화 커뮤니티에서는 AI가 생성한 예술에 대해 살해 위협까지 나올 정도로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어요. AI가 저작권이 있는 그림들을 학습 데이터로 삼아 유명 작가들의 화풍을 완벽하게 모방했기 때문인데요. 여기서 진짜 흥미로운 아이러니가 발생해요. 사실 일본의 아니메나 만화 산업은 팬아트처럼 인간이 저작물을 직접 재사용하는 문화에 꽤 관대했고, 오히려 팬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긍정적인 활동으로 보기도 했거든요. 하지만 AI를 사용한 것은 문화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선을 넘은 행위로 여겨졌어요. 인간의 재사용은 괜찮지만, 기계의 재사용은 안 된다는 거죠. 이 사건은 기계적인 생산 방식이 창의성과 노동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어요.
이런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창의성’이 뭔지부터 명확히 할 필요가 있어요. 철학자 마거릿 보덴(Margaret Boden)은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놀랍고, 새롭고, 가치 있는 것으로 정의해요. 이 새로움은 개인에게만 새로운 ‘P-creativity(개인적 창의성)‘일 수도 있고, 인류 역사상 처음 등장한 ‘H-creativity(역사적 창의성)‘일 수도 있죠.
현재 AI의 창의성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크게 두 가지 논리를 따라요.
- 정보이론적 관점: 정보이론적으로 본다는 건, 어떤 메시지가 얼마나 ‘놀라움’을 주느냐로 가치를 따지는 거예요. 앨런 블랙웰(Alan Blackwell)의 주장에 따르면, AI의 결과물이 아무리 놀라워도 거기에 ‘의도’가 없기 때문에 창의적이라고 할 수 없어요. 마치 우리가 계산기를 보고 “산수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아요. 계산기는 그저 정해진 규칙을 따를 뿐이니까요. AI가 내놓은 결과물에서 창의성을 발견한다면, 그건 타로 카드 점술사가 무작위로 배열된 카드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인간의 행위’에 가깝다는 거죠.
- ‘확률적 앵무새(Stochastic Parrots)’ 관점: 에밀리 벤더(Emily Bender), 팀닛 게브루(Timnit Gebru) 같은 연구자들은 AI가 훈련 데이터에 담긴 인간의 주관적인 판단과 편견을 그저 확률적으로 재생산할 뿐이라고 비판해요. 진짜 의미를 이해하고 창조하는 게 아니라, 앵무새처럼 말을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물론 이런 비판들은 매우 타당하고 중요해요. 하지만 이것들은 창의성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 중 일부에 불과해요. 이 글의 목적은 이런 지배적인 비판을 넘어서, AI와 창의성의 관계를 좀 더 폭넓고 미묘한 시각에서 탐구하는 거예요. 창의성을 평가하는 다양한 대안적 관점들을 살펴보면서 말이죠.
자, 그럼 지금부터 창의성에 대한 좀 더 넓은 세계로 들어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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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에 대한 다섯 가지 새로운 관점
AI 비판이 ‘콘텐츠’라는 결과물에만 집착하는 동안, 우리는 창의성의 진짜 무대인 ‘맥락’을 놓치고 있었어요. 지금부터 살펴볼 다섯 가지 관점은 바로 그 맥락을 보여주며, AI 창의성 논쟁의 판을 완전히 뒤집는 열쇠가 될 거예요.
관점 1: 과정 자체가 창의성이다 (Process as Creativity)
결과물보다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방법’ 그 자체를 예술로 보는 시각이에요. 개념 미술(Conceptual Art)이 대표적이죠. 예술가 솔 르윗(Sol LeWitt)은 “모든 계획과 결정은 사전에 결정되고, 실행은 형식적인 절차일 뿐이다. 아이디어가 예술을 만드는 기계가 된다”고 말했어요. 예술가는 결과물이 아니라, 그 결과물을 만드는 ‘규칙’이나 ‘프로세스’를 설계하는 데서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거죠.
이건 컴퓨터 과학의 ‘알고리즘’ 개념과도 비슷해요. 퀵 정렬이든 병합 정렬이든 결국 똑같이 데이터를 정렬해주지만, 우리는 두 알고리즘이 각기 다른 창의적인 기여를 했다고 인정하잖아요? 과정이 다르기 때문이죠. 이 관점에서 보면, AI의 창의성은 결과물이 아니라 그 결과물을 만들어낸 알고리즘, 혹은 인간-AI-데이터가 얽힌 복합적인 프로세스 자체에서 찾아야 할지도 몰라요.
관점 2: 작가의 의도와 담론이 창의성을 만든다 (Authorial Intent and Discourse as Creativity)
평범한 사물도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이에요. 1917년,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평범한 남성용 소변기에 <샘(Fountain)>이라는 제목을 붙여 전시회에 출품한 사건은 현대 미술의 흐름을 바꿔놓았죠. 작가의 ‘선택’이라는 행위 자체가 평범한 사물을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거예요.
이건 비단 예술계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인터넷에서 우리가 매일 하는 리트윗이나 리블로깅도 마찬가지예요. 원본 콘텐츠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수많은 정보 속에서 가치 있는 것을 골라내고 재전달하는 큐레이션 행위는 그 자체로 상당한 문화적 자본과 창의성으로 인정받고 있죠.
작가의 삶과 같은 외부 맥락이 작품의 의미를 결정하기도 해요. 마야 안젤루(Maya Angelou)의 시 <새장에 갇힌 새>를 한번 볼까요? 만약 그녀가 동물 권리 운동가였다면 이 시는 새를 새장에 가두는 행위에 대한 비판으로 읽혔을 거예요. 하지만 그녀가 민권 운동가였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새장’이 인종차별을, ‘새’가 억압받는 사람들을 상징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죠. 이처럼 창의성은 작품 자체에만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도와 사회적 담론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돼요.
관점 3: 해석하는 행위가 창의성이다 (Interpretation as Creativity)
작품의 의미는 작가가 정해주는 게 아니라, 그것을 읽고 보는 ‘독자’에 의해 완성된다는 시각이에요. 프랑스 문학 비평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작가의 죽음(Death of the Author)“이라는 개념을 통해, 텍스트의 최종적인 의미를 결정하는 권위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에게 있다고 주장했죠.
독자-반응 비평(Reader-response criticism)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작가의 의도를 맹신하는 것을 ‘의도적 오류(intentional fallacy)‘라고 비판해요. 작가가 글을 완성한 순간, 그는 다른 독자들과 똑같은 위치에 서게 되며, 자신의 작품에 대해 특별한 해석적 권위를 갖지 못한다는 거예요.
해리 포터 시리즈의 작가 J.K. 롤링과 팬덤의 관계는 이 관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예요. 초기에 팬들은 덤블도어 교수가 사실 동성애자였다는 작가의 선언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작품을 재해석했어요. 하지만 이후 작가가 트랜스젠더에 대한 논란적인 발언을 이어가자, 많은 팬들은 작가의 의도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어요. 이처럼 창의성은 작가의 손을 떠나 독자의 해석 행위 속에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요.
관점 4: 재사용이야말로 창의성의 본질이다 (Reuse as Creativity)
“모든 텍스트는 인용의 직물이다”라는 바르트의 말처럼, 세상에 완전한 무(無)에서 나온 창작은 없다는 관점이에요. 모든 창의적인 행위는 결국 기존에 존재하던 문화적 요소들을 새롭게 조합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이라는 거죠.
재즈 연주에서 다른 유명한 곡의 멜로디를 짧게 끼워 넣는 ‘인용(quotation)‘이나 힙합 음악에서 기존 음원의 일부를 가져와 사용하는 ‘샘플링(sampling)‘이 좋은 예예요. 이런 커뮤니티에서는 출처를 일일이 밝히지 않고 재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선배 아티스트에 대한 존경과 대화의 방식으로 여겨져요. 래퍼 푸샤 티(Pusha T)의 말처럼, “아는 사람은 안다(If you know, you know)“는 식이죠.
심지어 처음에는 속임수였던 문학적 ‘위조(forgery)‘가 나중에는 그 자체의 창의성과 기교로 인정받는 경우도 있어요. 18세기 시인 토머스 채터턴(Thomas Chatterton)이 중세 시대 사제가 쓴 것처럼 꾸며 발표한 시들은 처음엔 논란이 됐지만, 지금은 그의 놀라운 재능과 독창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죠. 이 관점에서 보면, AI가 기존 데이터를 재조합하는 것은 표절이 아니라 창의성의 본질적인 모습일 수 있어요.
관점 5: 무작위성도 창의성의 원천이 될 수 있다 (Randomness as Creativity)
무작위적인 요소가 창작의 중요한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관점이에요. 타로 카드를 펼쳐 영감을 얻거나, 존 케이지(John Cage)가 동전 던지기 같은 우연적인 방법으로 음악을 작곡한 것이 그 예시죠.
여기서 더 나아가면, 무작위적인 과정 자체가 다른 주체의 ‘창의적 행위’로 받아들여지기도 해요.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의식의 개입을 차단하고 무의식이 쓰는 대로 글을 쓰려 했던 ‘자동 기술법(automatic writing)‘이나, 동양의 ‘영매 글쓰기(spirit writing)‘처럼 신이나 영적인 존재가 사람의 손을 빌려 글을 쓴다고 믿는 문화들이 그래요. 이들에게 무작위성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잠재의식이나 초월적 존재의 목소리, 즉 또 다른 창의성의 원천으로 여겨지는 거죠.
이처럼 창의성을 과정, 의도, 해석의 문제로 바라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형식’과 ‘내용’의 구분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해요. 그리고 그 구분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바로 ‘노동’과 ‘기계화’의 문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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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 내용, 그리고 노동의 문제
우리가 창의성을 평가할 때 무심코 받아들이는 ‘형식(form)‘과 ‘내용(content)‘의 구분은 사실 매우 유동적이에요. 특히 어떤 부분에 인간의 ‘노동’이 들어가고, 어떤 부분이 ‘기계화’되는지에 따라 그 경계는 계속해서 변하죠. 이 문제를 깊이 파고드는 것은 AI 시대의 창의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해요.
형식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어떤 텍스트의 ‘형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장르와 맥락에 따라 천차만별이에요. 뉴스 기사는 줄 바꿈을 좀 바꾼다고 해서 내용이 달라지지 않지만, 시(poem)는 줄 바꿈 하나하나가 의미에 큰 영향을 미치죠. 학교 과제에 제출하는 글의 글꼴은 중요하지 않지만, 잡지 광고에서 글꼴은 메시지 그 자체만큼이나 중요해요. 이처럼 ‘형식’의 중요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어떤 맥락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형식이 내용을 얼마나 결정하는가?
형식과 내용의 관계에 대해서는 양극단의 관점이 존재해요.
| 관점 | 핵심 주장 | 예시 |
|---|---|---|
| 내용이 형식과 분리됨 | 아이디어나 줄거리 같은 추상적인 ‘내용’이 중요하며,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은 부차적이다. | 대중적인 영화나 소설에서 다른 작품의 플롯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 “진부하다”, “클리셰다”라고 비판받는 경우. 여기서 중요한 건 구체적인 문장(형식)이 아니라 이야기의 뼈대(내용)예요. |
| 내용이 형식과 일치함 | 시의 한 구절, 문장의 정확한 표현 등 구체적인 ‘형식’을 바꾸면 ‘내용’ 자체가 완전히 변한다. |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번역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 것처럼, 언어(형식)를 바꾸는 순간 원본이 가진 고유한 내용과 분위기는 결코 완벽하게 전달될 수 없다는 관점이에요. |
어떤 때는 아이디어가 중요하고, 어떤 때는 표현 그 자체가 중요한 거죠. AI가 만든 결과물을 평가할 때 우리가 어떤 잣대를 들이대느냐에 따라 “표절”이 될 수도 있고 “새로운 창작”이 될 수도 있는 이유예요.
노동, 기계화, 그리고 창의성
창의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떤 일이 ‘기계적 복제’가 얼마나 쉬운지와 깊은 관련이 있어요. 여기에 아주 중요한 패턴이 숨어있어요. 어떤 작업에서 인간의 ‘노동’이 줄어들고 기계적 복제가 쉬워질수록, 우리는 그 결과물을 더 이상 독창적인 ‘작품’이 아닌 단순한 ‘복제품’으로 여기게 된다는 거죠.
중세 시대 필사본이나 조각가의 제자가 만든 복제품을 생각해 보세요. 비록 원본을 베낀 것이지만, 거기에는 인간의 수고와 ‘노동’이 들어갔기 때문에 그 자체로 가치를 인정받았어요. 하지만 인쇄술로 찍어낸 책이나 3D 프린터로 만든 조각상은 원본의 가치를 그대로 갖지 못하고 그저 ‘복제품’으로만 여겨지죠.
AI가 생성한 팬아트가 큰 논란이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어요. 손으로 직접 그림을 그리는 고된 ‘노동’의 과정이 사라지고, 창작이 너무나 쉬워졌기 때문이에요. 아티스트 켈리 맥커넌(Kelly McKernan)의 말은 많은 창작자들의 심정을 대변해요. “저는 대부분의 달에 월세를 거의 못 낼 뻔해요. 30시간 걸려서 그림 하나를 완성하는데… AI는 제 스타일을 베껴서 순식간에 비슷한 이미지를 만들어내죠. 이건 제 영역을 침해당하는 기분이에요.”
이처럼 기술의 발전으로 특정 노동이 쉬워지거나 사라지면, 우리는 창의성의 가치를 다른 곳에서 찾기 시작해요. 이런 변화는 기존의 지적 재산권(IP) 법이 가진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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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재산권은 정답이 될 수 없다
AI 창의성 논쟁의 해결사처럼 등장하는 지적 재산권(IP) 법은 사실 문제 해결은커녕, 특정 권력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교묘하게 설계된 도구에 가까워요. IP 법에 기대는 것은 실패가 예정된 프로젝트에 올라타는 것과 같아요.
IP 법의 이중적 과제와 표기법 의존
IP 법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상충되는 목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어요. 하나는 ‘혁신을 규제’하려는 경제적 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창의성을 정의’하려는 철학적 목적이죠. 이 두 가지 목적이 충돌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해요.
특히 법은 아이디어를 비교하고 판단하기 위해 특정 형식의 표기법(notation)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요. 예를 들어, 음악 저작권 소송에서는 심사위원단이 실제 음악을 직접 듣는 대신, 법원이 지정한 악보(표기법)만 보고 표절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황당한 경우가 발생해요. 대부분의 대중음악은 악보로 만들어지지도 않고, 악보로 표현될 수도 없는 미묘한 뉘앙스를 담고 있는데도 말이죠. 법이 특정 ‘형식’에만 의존할 때, 진짜 창의적인 ‘내용’을 놓치게 되는 거예요.
법적 정의가 낳는 사회적 해악
IP 법은 창의성을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창작 활동을 위축시키는 부작용을 낳기도 해요.
- 표절 소송의 공포: 2015년, 퍼렐 윌리엄스의 <Blurred Lines>가 마빈 게이의 곡을 표절했다는 판결이 나온 이후, 많은 작곡가들이 창작 과정에서 극심한 불안감을 느끼게 됐어요. 무의식중에 다른 곡과 비슷해질까 봐 두려워하며 자기 검열을 하게 된 거죠. 한 작곡가는 “코러스를 쓰려고 할 때 법적 판례를 떠올려야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라고 토로했어요.
- 과도한 인용: 2022년, 비욘세(Beyoncé)는 싱글 <Break My Soul>을 발표하면서 법적 분쟁을 피하기 위해 여러 아티스트를 미리 공동 작곡가로 등록했어요. 이는 창의적 영향에 대한 존중이라기보다는, 잠재적인 법적 위협에 대한 방어적 조치에 가까웠죠. 이런 행태는 창작의 자유로운 흐름을 막고, 모든 것을 법적 거래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려요.
결론적으로, IP 법에 의존하는 것은 AI 시대의 창의성을 이해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아요. 오히려 특정 권력자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도구로 작동할 뿐이죠.
그렇다면 이 혼란 속에서 실제 현장의 전문가들은 AI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그들의 ‘커뮤니티 규범’은 어떻게 변하고 있을까요?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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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 ‘생산’에서 ‘비판적 통합’으로의 전환
지금까지의 복잡한 논의를 종합해 보면, AI가 우리의 지식 노동과 창의성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돼요. 그 핵심은 바로 노동의 중심이 ‘물질적 생산’에서 ‘비판적 통합(critical integration)‘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거예요.
AI는 텍스트를 쓰거나 이미지를 만드는 ‘물질적 생산(material production)‘의 비용을 거의 제로에 가깝게 만들었어요. 그렇다면 인간의 창의적 노동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요? 답은 명확해요.
이제 인간의 역할은 AI에게 적절한 목표를 설정하고 지시를 내리며(프롬프트 엔지니어링), AI가 생성한 수많은 결과물의 품질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고, 그것들을 더 큰 작업 흐름이나 프로젝트에 매끄럽게 통합하는 거예요. 단순히 결과물을 ‘만드는’ 행위를 넘어, 그것을 ‘선별하고, 편집하고, 맥락을 부여하는’ 능력이 핵심이 된 거죠.
이 ‘비판적 통합’ 워크플로우를 간단한 순서도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아요.
이러한 변화는 이미 여러 분야에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어요.
- 글쓰기: 작가들은 AI가 제안한 아이디어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아요. 대신 그것을 해석하고 변형하여 자신의 이야기 속에 녹여내는 ‘통합적 도약(integrative leaps)‘을 통해 최종 결과물에 대한 저자성을 확보해요. AI는 아이디어를 주는 파트너일 뿐, 이야기를 완성하는 것은 여전히 작가의 몫인 거죠.
- 시각 예술: 아티스트들은 어떤 AI 모델을 선택할지, 어떤 데이터로 학습시킬지, 그리고 수많은 결과물 중 어떤 것을 최종 작품으로 ‘큐레이팅’할지를 결정하는 전 과정에서 예술적 판단을 내려요. 한 아티스트는 AI가 “나보다 더 창의적일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작품에 문화적 맥락을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핵심 역할이라고 말해요.
- 프로그래밍: 이제 개발자의 핵심 기술은 코드를 한 줄 한 줄 직접 짜는 것에서, AI에게 ‘적절한 수준’으로 문제를 나눠서 지시하고, AI가 생성한 코드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디버깅하는 능력으로 바뀌고 있어요.
물론 기술이 만들어내는 획일성에 대한 저항도 나타날 거예요. 화웨이 스마트폰의 ‘달 사진 모드’ 논란이 좋은 예예요. AI가 사용자의 사진을 미리 저장된 고화질 달 이미지와 합성해 보여주자, 사람들은 “이건 내 사진이 아니다”라며 반발했죠. 비록 흐릿하더라도, 내가 직접 찍은 ‘나의 것’을 원했던 거예요. 이처럼 기술이 강요하는 완벽함에 저항하고 개인의 독창성을 되찾으려는 문화적 반전(cultural reversal)은 앞으로 더 강해질 수 있어요.
AI 시대에 창의성은 죽지 않았어요. 다만, 그 중심이 ‘기계적 생산’에서 ‘인간의 비판적 통합’으로 옮겨가고 있을 뿐이에요.
원문: Sarkar, A. (2023). “AI and the Future of Knowledge Work” - Advait Sarkar (2023년 7월 20일)
생성: Claude (Anthropic)